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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을 문학산책] 가을 전시회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10월 12일
ⓒ e-전라매일
현악기들의 합주가 내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장엄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미롭기도 한 사이 외마디를 지르는 듯한 나팔 소리가 고요한 마음을 일깨우기도 했다. 팀파니와 북소리가 현악기의 합주에 새로운 통로를 열며, 오케스트라의 변주에 떠오르는 피오르와 겹쳐지는 영상들은 우리의 가을이었다. 북유럽의 교향곡은 갑자기 가을 전시회장의 배경음악이 된다.
서막은 제주에서 시작됐다. 초가을의 바닷바람이 아직은 시원해 가슴이 열렸다. 버스를 타고 제주시를 관통하면서 자매들과의 우의도 다졌다. 성산포의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흰 거품을 토해내는 망망한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잡다한 상념들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해안의 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치솟을 것 같은 전율도 일었다. 서늘하고 상쾌한 바람을 안고 산굼부리 억새밭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동안 변덕스러운 제주의 날씨는 비를 뿌리기도 했지만, 한라산을 닮은 산굼부리 분화구는 젖은 그림 한 장이 됐다. 다음 날은 ‘오설록’의 전시장이었다.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녹차 케이크와 아이스크림도 즐겼다. 바다같이 넓은 차나무 밭에서 어여쁜 차 꽃들과 숨바꼭질하며 한나절 놀았다.
차나무는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차나무의 꽃은 모른다. 단지 초록 잎들이 바다같이 펼친 차밭의 풍경만으로도 환호한다. 차꽃은 가을에 피어난다. 지난해 가을에 피어서 겨울 지나면서 열매를 맺어 봄여름 동안 키운다. 익은 열매가 달린 가지에서 새로운 동생 꽃이 핀다고 해 화실상봉수, 즉 꽃과 열매가 한 가지에서 만난다고 해 그렇게 부른다. 한 청년이 차꽃을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기에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새삼스러운 발견을 했다고 매우 기뻐했다. 기쁨을 나누니 두 배 즐거웠다. 기계로 찻잎을 깎아내지 않은 차밭에서 가을의 새잎을 한 줌 따서 그날 밤 청차를 빚었다. 오묘한 바닷바람이 베인 차 맛까지 즐길 수 있었다.
가을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지리산으로 뒤좇아 갈까 하던 발걸음을 되돌린다. 언젠가 충주호를 지나 제천의 송계리에서 취했던 월악산의 정취가 생각났다. 밤을 새운 다음 날 아침 월악산 덕주사의 단풍에 감격했다. 기다려주기나 했던 것 같은 덕주사 단풍나무는 오케스트라의 1악장이었다고나 할까. 계곡을 지나 영봉 밑의 마애불까지가 1.6 km여서 오르기로 한다. 영봉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신령 영(靈)자가 붙는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뿐이라지 않는가. 넓은 돌바닥 길은 걷기는 쉽지만, 계속 오르는 길이어서 힘들다.
숲속은 단풍이 져가는 중이다. 오케스트라의 2악장을 연주하는 것일까. 조용히 숨 고르며 오르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기운을 나게 하듯 우람한 나무 자태는 생기를 채워준다. 발걸음이 무거워져서 너럭돌 위에 앉아서 숨을 고른다. 숲속의 나무에 기대니 나도 숲의 일원인 한 나무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잎을 여위어 가고 있는 가운데 초목들과 쓰러져 누운 풀더미조차 한세월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인간 군상들도 세상 숲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숨찼던 세월을 고르기 위해 산을 오를까.
드디어 마애불로 들어서는 대문이 나온다. 협주곡에서 피아노가 강렬한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등장하듯 커다란 은행나무는 화면을 꽉 채우는 듯 그렇게 감동적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동행한 여인의 빨간 점퍼가 샛노란 은행나무 둥치에 매미처럼 붙어 있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마애불 단 아래의 빨간 단풍나무는 또 하나의 현란한 피아노의 외침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스러질 듯 놀람의 감동으로 저절로 마애불 앞에 엎드려진다. 삼배를 올리고 나도 부처 모양으로 명상 자세를 취했다. 넓은 바위 표면에 음각으로 새긴 불상이다. 바위에 새긴 것이 가장 오래 기억되리란 믿음으로 천 년을 이어가는 불상으로 남았다. 본래 부처가 바위 속에 숨었다가 선각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높은 곳의 산신각 앞에 서니 주변 산 능선이 한눈에 펼쳐 보인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제각각의 특유한 소리를 뿜어내어 교향곡의 클라이맥스를 장엄하는 듯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마침 낮달까지 하늘에 떠서 소리 없는 그림으로 월악산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한다. 가슴이 환해진다. 그대로 마애불 옆에 그냥 머물고 싶다.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아쉽게도‘아다지오’로 내려가야 한다.
늙어서 아름다운 절, 화암사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안도현의 <내 사랑, 화암사>와 나의 글 <화암사>의 추억이 새롭다. 다시 찾은 화암사의 극락전은 좀 더 늙어진 것 같아 아련했다. 극락전 안의 닫집의 오묘한 조각품들이 새로운 기운을 주기도 하고, 승탑 비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가을 산의 합주곡도 강렬했다.
가을 색 진한 그림이 많다. 인상적인 것은 대둔산 안심사 가는 길의 감나무. 가을 하늘에 빨간 점을 무수히 찍고 있다. 바라보면서 달콤한 가을을 먹는 그림이다. 수확하지 않는 것은 먹는 것보다 보는 맛을 더 즐기라는 뜻이지 싶다. 줄줄이 그 단맛을 간직하려 살을 말리며 애쓰는 곶감 줄이 또 하나의 화폭이다. 이어서 안심사 들머리의 빼어난 소나무와 대비된 우람한 단풍나무들. 경내의 단풍나무의 물감이 절정으로 그 색을 자아내고 있다. 자신의 선 자리에 따라서 먼저 피었다 가는 나무와 절정을 타오르는 나무가 서로 이별의 손짓을 나누는 것도 같다. 지난했던 삶의 고비를 넘기면서 쌓인 색깔이리라. 아름다움이란 나타난 형상이 사라져가는 순간의 빛남이 아니던가. 잡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아름다움의 정체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있으며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꽃피우리라.
단풍 숲에서 가을을 잔뜩 먹은 몸을 뉘었다. 붉게 물든 나무 밑에서 나도 붉어져서 망연했을 때, 떨어지는 단풍잎이 말을 건네는 듯 내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꽃필 때가 있으면 그 꽃 지는 때도 반드시 있다고… 떨어져 쌓인 낙엽 위로 바람의 현이 스친다.

/조윤수
전주문협회원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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