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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철 ESG연재 10회 - 재난의 진흙탕에서 피어난 발렌시아가 건네는 건강도시 지도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01일
김태철
한국탄소산업진흥협회 부회장/공학박사, 본지 ESG 전문기자

지중해의 푸른 파도가 속삭이고, 오렌지 향기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도시. 스페인 제3의 도시 발렌시아(València)를 수식하는 말들은 대개 평화롭고 찬란하다. 2021년과 202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도시’ 1위, 그리고 2024년 ‘유럽 녹색 수도(European Green Capital)’라는 왕관을 쓴 이 도시는 오늘날 전 세계 도시 기획자들이 성지순례 하듯 찾는 ‘건강도시’의 표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찬란한 녹색의 이면에는 반세기 전 흘렸던 거대한 자연재해의 눈물과, 그 눈물을 희망의 동력으로 바꿔낸 시민들의 위대한 서사가 숨어 있다.
시민들은 희망을 보고 비극의 강물 위에서 쓴 ‘투리아의 기적’이다.
발렌시아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57년 발생한 대홍수(La Riada)였다. 도심을 가로지르던 투리아강이 범람하며 도시의 75%가 침수되었고, 수많은 생명이 진흙탕 속에 스러져갔다. 정부는 재발 방지를 위해 강줄기를 도심 남쪽으로 돌리는 ‘남부 계획(Plan Sur)’을 단행했다. 물이 빠져나간 8.5km의 거대한 옛 강바닥을 두고, 당시 권위주의 정부는 그 자리에 도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했다. 이때 발렌시아의 역사를 뒤바꾼 외침이 터져 나왔다. “투리아의 강바닥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녹지를 원한다”는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관료주의의 견고한 벽 앞에서 시민들은 자본과 속도의 상징인 ‘도로’ 대신, 휴식과 생명의 상징인 ‘푸른 숲’을 선택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조성된 136헥타르 규모의 ‘투리아 정원(Jardín del Turia)’은 그렇게 재난의 상흔을 도시의 가장 강력한 ‘녹색 폐’로 탈바꿈시킨 인류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발렌시아가 단순히 아름다운 공원 하나를 가졌기에 건강도시라 불리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건강은 구체적인 수치와 혁신적인 정책으로 증명된다. 발렌시아 시민의 평균 기대 수명은 83.5세에 달하는데, 이는 지중해식 식단과 더불어 낮은 대기 오염 수치가 결합된 결과다. 놀라운 점은 도시 인구의 97%가 집에서 불과 300m 이내에 녹지 공간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160km가 넘는 자전거 도로와 정원 내부의 러닝 트랙은 시민들의 일상을 활기찬 리듬으로 채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이들은 고정관념을 깬다. 시립 공동묘지 5곳의 지붕에 7,000여 장의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레퀴엠 인 파워(RIP)’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죽음의 공간이 도시를 살리는 재생에너지의 보고로 거듭난 이 사례는 공공 부지 활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또한 700여 명의 학생이 도심 나무들의 탄소 흡수량을 직접 측정하는 ‘코-카본(Co-Carbon)’ 프로젝트는 데이터 기반의 도시 계획에 시민의 손길을 입히는 정교한 거버넌스의 산물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지표가 증명하는 건강한 삶, 그리고 ‘RIP’의 철학이 있는 도시다. 재난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 발렌시아는 세계 최초로 관광객의 탄소 및 물 발자국을 계산하여 인증받은 도시이기도 하다. 생물다양성의 회복이 곧 도시의 경쟁력이자 지속가능의 도시가 되기위해서 연속적인 수익으로 직결되어야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발렌시아의 재생에너지 공동체 활성화에도 지자체와 시민들은 함께 한다.그러나 이들의 여정이 마냥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2024년 10월 발생한 사상 최악의 폭우(DANA) 속에서 도심 역사 지구는 인공 수로 덕에 안전했지만, 강줄기를 돌린 ‘남부 계획’으로 인해 위험이 전가된 외곽 위성도시들은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발렌시아는 이 뼈아픈 교훈을 외면하지 않는다. 위험을 외부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흡수하고 회복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갖추기 위해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미개발 구간인 하구를 녹지화하여 도시와 바다를 온전히 잇는 ‘마우스 파크(Parque de Desembocadura)’ 프로젝트는 소외된 지역에 자연을 돌려주는 ‘역사적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과 전북의 도시들이 발렌시아에게 물어야 된다. 발렌시아의 사례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건강도시는 단순히 병원과 공원 몇 군데를 더 만드는 토목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모든 정책에 보건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 ‘다층적 거버넌스와 모든 정책에 건강을(HiAP)’ 체계 확립이다.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미래의 인프라로 전환해나가는 지속가능발전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시민공동체의 결단이다. 현재 발렌시아는 ‘발렌시아 2030 기후 미션’을 통해 민관이 원탁에 둘러앉아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라는 현대 도시의 고질병 앞에서도 이들은 불법 숙박업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주거권 보호라는 사법적 조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별히 주민과 관광객이 공존할 수 있는 ‘수용능력’을 관리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시민들은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도시의 매력이 주민의 고통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이 정교한 지배구조(G)야말로 ESG 건강도시의 완성이다. 고령화와 도심 소멸이라는 난제 앞에 선 대한민국과 전북의 도시들에게 발렌시아의 ‘녹색 심장’은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건강한 도시는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재난의 진흙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는 녹지를 원한다”고 외쳤던 시민들의 용기, 그리고 그 목소리를 정책의 심장으로 삼은 행정의 지혜가 만날 때 비로소 허락되는 훈장이다. 결론적으로 발렌시아 시민들의 시정참여는 재난의 상흔을 도시의 ‘녹색 폐’로 탈바꿈시켰으며, 현재는 E
SG 가치를 실현하는 지속가능한 건강도시를 만드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시개발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사람, 미래산업을 리딩하는 기업체들, 환경과 개발을 조화롭게 추진할 수 있는 경험이 있는 사람, 예술가, 과학자 등 기업가정신의 역량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리더와 추진 주체들이 필요하다. 발렌시아의 투리아 정원에서 걷고, 뛰고 라이딩하는 시민들의 발걸음 소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여러분의 도시와 여러분은 미래의 건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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