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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편지함 - 신영규
하룻밤이 스스로 제 껍질을 허물 벗으며 맨몸으로 일어선다
메마른 새벽녘, 대문의 편지함, 건들바람은 어젯밤과 새날의 틈새에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침묵은 말 이전의 말인 것을
질문들만 몽땅 남기고 그대 떠난 어제, 오늘, 편지함 속엔 아무런 응답도 없다
침묵은 질문 이전의 질문인 것을
그대와 나의 그 간격 거리를 굳이 측정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 밤의 끝을 붙들고 맴도는 그 가늠할 수 없는 생각들
침묵은 응답 이전의 응답인 것을
하룻밤이 스스로 제 껍질을 허물 벗으며 맨몸으로 일어선다 □ 정성수의 시 감상 □
시「빈 편지함」은 비어 있음 속에서 오히려 깊은 의미를 길어 올리는 서정시이다. 시인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편지함을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침묵의 철학으로 승화했다. 첫 연의“하룻밤이 스스로 제 껍질을 허물 벗으며 맨몸으로 일어선다”는 밤과 새벽의 경계를 생명체의 탈피 과정에 비유해 새로운 시간의 탄생을 강렬하면서도 신선하게 보여 준다. 특히“침묵은 말 이전의 말인 것을”,“침묵은 질문 이전의 질문인 것을”,“침묵은 응답 이전의 응답인 것을”이라는 반복 구절은 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시적 장치이다. 이는 인간 내면의 감정과 관계의 본질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뛰어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빈 편지함”이라는 시 제목은 기다림과 상실을 상징하면서도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아무 응답이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비어 있음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여백의 미학이 살아 있다.“그대와 나의 그 간격 거리를 굳이 측정하지 말자”라는 구절에서는 사랑과 이별을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 감정의 깊이를 섬세하게 드러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시는 과장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잔잔한 울림을 오래 남게 한다. 절제된 언어와 깊이 있는 상징, 반복을 통한 리듬감이 조화는 현대 시가 지닌 사유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읽고 난 뒤에도 빈 편지함 앞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따라서 침묵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품격 높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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