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국새가 울면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9월 30일
형효순 수필가
산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난다. 밭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 얼마간 잔소리를 들은 뒤에야 남편은 트랙터에 시동을 걸었다. 밭은 삽시간에 갈아져 흙이 떡가루처럼 포슬포슬 해졌다. 밭을 고른다. 콩 이랑은 많이, 고추는 이만큼, 참깨도 저만큼, 고구마는 요만큼, 울금과 생강은 조금, 도라지와 토란 심을 곳도 쪼금은 남겨둔다. 곧은 곳은 곧게 이랑을 만들고, 굽은 곳은 굽은 대로 고랑을 만들다보면 우리 집 조각 상보와 거의 비슷하다. 머지않아 갖가지 형태의 초록 물결을 이루겠지. 저마다의 색깔과 모습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뽐내기도 하지만 가뭄과 장마는 물론 병충해와 잡초, 끊임없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앉아 새참을 먹는다. 햇살에 등이 따뜻하다. 아까부터 목 놓아 울어 제끼던 쑥국새소리에 몇 십 년 전 예닐곱 어린아이가 살랑거리며 찾아왔다. 그때도 산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났었지. 쑥꾹새 소리도 지금과 같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버지께 밭갈이 성화가 잦았다. 쑥꾹새가 저리 우는 것은 어서어서 씨앗을 뿌리라는 소리라고 하시면서…. 쟁기를 지게에 지고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들판으로 아버지는 황소와 함께 느릿느릿 걸어가셨다. 당연히 샛거리 심부름은 나였다. 단단했던 땅이 아버지와 소가 한걸음을 뗄 때마다 흙이 마치 지붕 위 기왓장처럼 물결을 만든다. 샛거리가 왔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버지는 한참을 지나 소에게 풀을 뜯게하고 나서야 막걸리 한 사발을 맛있게 잡수셨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던 그 따뜻했던 눈빛이 그냥 좋았다. 황소의 코뚜레를 잡아 멍에를 다시 씌운다. 아버지와 황소는 별 말이 없다. 고삐를 잡아당기는 아버지의 손힘에 따라 황소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쉬어야 하는지 돌아야 하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까닭이다. 황소가 된 숨을 쉬며 입가에 허연 거품이 일면 잠시 세워두고 쉬게 하는 것이 모두인 들판은 심심하리만치 조용하다. 벌이 윙윙 거리는 소리와 아지랑이만 어지럽다. 뒤늦게 우리 집 워리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언덕의 검불을 뒤집어쓰고 이리딩굴 저리딩굴 혼자 온갖 재주를 다부리지만 황소는 관심이 없고 나와 아버지도 보아주지 않으면 양지쪽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다. 해가 설핏하면 좁은 논둑길에 워리가 앞장서고 황소가 걸어가고 내가 소고삐를 잡으면 아버지는 행여 황소가 눈치 챌까 두려워 나를 뒤로 보내곤 하셨다. 논이나 밭을 가는 날 소여물죽은 특별했다. 다른 날 보다 죽제도 한바가지 더 넣고 보리쌀 한 종구랭이, 콩 한 주먹, 고구마 너덧 개, 누런 호박 서너 조각, 어머니가 캐어다 놓은 파란 봄풀 한소쿠리에 된장도 약간. 쇠죽이 끓으면 마당에는 구수한 쇠죽냄새가 가득 퍼지고 황소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구시통 앞에 일어선다. 황소가 맛있게 쇠죽을 먹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아버지도 저녁상을 마주 하시고 우리도 상 앞에 둘러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도록 호롱불을 밝히고 아버지는 꼴목다리를 만들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셨다. 그런 날 밤 내 일기장에는 아버지와 황소, 지렁이 모양의 아지랑이와 이상하게 생긴 새 한 마리가 그려졌었지. 긴 겨울밤 여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말씀보다 솟종새 울음소리가 더 파고들던 기억들이 이제는 빛바랜 그림처럼 아슴푸레하다. 아버지의 웃음이 늘 쓸쓸하셨던 것은 가슴속에 묻은 자식들 셋 때문이었겠지만 알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어 모습마저 희미한 아버지.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봄날, 유년의 뜰에는 언제나 유난스럽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어서 좋다. 황소보다 수 만 배의 힘을 가진 트랙터는 순식간에 밭을 갈고 가버렸다. 들판은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내년에도 산 벚꽃은 피어나고, 건강하다면 우리는 밭을 갈고 고향을 생각하고 또 다시 아버지가 그립고. 먼 훗날 자식들도 이렇게 우리를 그리워 할 테고. 쑥국새는 여전이 울겠지.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9월 30일
- Copyrights ⓒ주)전라매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오피니언
가장 많이본 뉴스
기획특집
포토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