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29 18:32:33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PDF원격
검색
PDF 면보기
속보
;
지면보다 빠른 뉴스
전자신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전라매일
·17:00
··
·17:00
··
·17:00
··
·17:00
·16:00
··
·16:00
뉴스 > 칼럼

오래된 집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10월 29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법화산 자락이 밀고 내려와 똬리를 튼 곳, 할미산이 황금알을 불끈 밀어 올리는 풍경을 마주하는 곳, 거기에 잠들지 않는 고향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백화산이 거인처럼 성큼 눈앞에 서 있고, 시선을 좌로 하면 남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손을 휘이~ 저으면 듬직한 장안산이 품에 안긴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화양리 475-1번지 아흔이 넘은 오래된 집, 거기에 유년의 박물관이 있다.

법화산이 마을을 품고 성지골, 불무골에서 솟구친 물길이 마을을 가로질러 유천에 이르고, 장안산 지지골에서 시작된 지천과 합하여 금강이 물길을 연다. 큰 대(大)자 형상을 띠고 마을 가운데에 고대 족장의 무덤인 양 알봉이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 난평(卵坪)마을이다. 그중 사람이 머리를 두른 자리 상지담에 나의 유년이 살고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의 어머니가 살았던 오래된 고향집이 있다.

구십팔 호가 살았던 마을에서 상지담에는 일곱 지붕 아래 열한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아래채에도 부뚜막을 걸어 놓고 살림집을 꾸몄다. 전주에서 비포장 시골길을 버스로 세 시간하고도 반이나 더 가야 하는 산골은 산자락을 개간하여 고구마나 밀보리를 심었고 더러는 담배 농사를 짓거나 고랭지 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지주들의 토지를 얻어 소작하다가 쌀계를 타거나 돈을 모으면 반듯한 논 한 마지기 사는 것이 꿈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는 해방 전 초근목피로 입에 풀칠도 어려운 시절 북간도로 이주해 타국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열여덟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종중 토지 한 귀퉁이를 빌려 산자락 아래 토담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터를 잡고 살았다. 뒤안에는 나지막이 돌담을 쌓고 감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감나무 아래는 엎드려 고개를 내밀면 입에 닿을 수 있는 옹달샘을 팠고, 감나무 앞에는 널찍널찍한 돌을 괴고 장독대를 두었다. 장독대 주변은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봉숭아를 심었다. 여름이면 할머니께서 손주들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 주셨다. 할머니는 증손주가 대학에 갈 때까지 고부지간에 장을 직접 담그셨다. 그리고는 이듬해 봄까지 씨간장을 늘 남겨 두셨다. 가을이면 비어 있는 단지에 잘 익은 감을 담아 두셨고, 수롱골 최 부잣집 산에 심어진 고염을 얻어 와 자그마한 옹기에 꼭꼭 눌러 재워 두셨다. 할머니는 긴긴 겨울밤이면 화롯불이 다 사위어 갈 때까지 어둠이 깊도록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고, 배가 촐촐해지면 호야 등을 잡고 장독대 홍시와 찰진 고염을 한 종발 퍼 오셨다.

본채의 정지 뒷문을 열고 나서면 곧바로 장독대를 만날 수 있었고, 옆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돌로 쌓은 옹달샘이 있었다. 장독대가 있는 뒤안에는 정지 뒷문 가까이에 고추나 깨를 갈아내는 함지박 같은 학독이 고인돌처럼 아랫배를 괴고 있었고, 큰방 뒷문을 열면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여름날이면 으레 어머니께서 앉은뱅이 소반에 툇마루로 점심상을 내어 오셨다. 시원한 샘물에 텃밭 오이채를 썰고 풋고추에 소금과 사카린을 넣은 오이채에 대소쿠리에 담아 둔 보리밥 몇 덩이로 허기를 채우고는 했다. 점심상을 물리신 아버지는 목침을 베고 감나무 그늘진 툇마루에서 잠깐의 꿀잠을 즐기셨다.

본채는 방문을 열면 백화산이 바라보이는 동향집이었다. 삽작은 행랑채를 통해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삽작을 따라 천수네 미나리꽝을 지나면 춘자네 집이 나오고, 춘자네 마늘밭을 건너면 마을을 관통하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큰재를 오르는 물길을 따라 화강암 반석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는 이를 반석이라 불렀고 자연스레 냇가 이름도 반석이라 불리고 있었다. 골골이 버들치와 가재가 살고 있었고, 초복 무렵이면 노란 나리꽃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름밤이면 반석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고 놀이터였고 잠자리였다. 대낮에 달구어진 반석이 구들장을 지고 누운 것처럼 따뜻했고, 물길을 거슬러 불어오는 밤바람에 홑이불 하나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풀밭의 반딧불을 쫓기도 하고, 별자리를 배운 아이들은 별자리를 찾다 잠이 들고는 했다.

대문이 들어서 있는 행랑채에는 돼지우리와 허청이 있었고, 대문 반대편에는 광을 하나 들여놓았다. 광에는 사방 벽에 시렁을 두르고 잡다한 농기구와 곡물 포대를 넣어 두었다. 허청 한 칸을 가운데 두었는데 여기에는 아궁이 재를 모아 두는 잿간을 두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식구들이 배설한 오줌을 거름에 보탠다고 잿간에 뿌려 주었다. 잿간의 재는 이듬해 부추밭에 밑거름으로 뿌려졌고, 재거름을 먹고 자란 부추는 여름 내내 우리 집 밥상머리에 반찬이 되어 주었다.

아래채는 행랑채와 마주 보고 있었다. 네 칸이었는데 본채에서 제일 먼 바깥 칸에 변소가 있었고 다음은 소 우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아궁이에 쇠죽솥이 걸려 있는 소 우리 옆에 아랫방이 붙어 있었다. 겨울에는 소도 사람과 같이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여물을 건초와 섞어 쇠죽솥에 끓여서 먹였다. 쇠죽솥 아궁이는 불땀이 오래가는 장작을 땠다. 장작으로 쇠죽을 끓이며 달궈진 구들장은 겨울밤마다 펄펄 끓었고, 그 방은 늘 할머니 차지였다. 손주들은 밤마다 할머니 가까운 잠자리를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고는 하였다. 아랫방에는 남향으로 들창문을 내 두었는데 아래채 뒤에는 오래된 밤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 있었다. 가을날 밤톨이 여물고 비바람이 칠 때면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양철지붕을 요란하게 흔들어 댔다. 비가 그치고 이른 새벽이면 할머니는 남포등을 들고 실하게 여문 반지르르한 밤톨을 한 소쿠리씩 주워 오시고는 했다. 이 밤나무 숲은 상지담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래채 마지막 칸은 뒤지로 사용하였다. 가을에 타작이 끝난 벼를 저장해 두는 나락 곳간이었다. 뒤지 문은 납작하고 길쭉한 열 개의 판자문을 홈으로 파 놓은 문기둥에 숫자대로 끼워 사용하였다.

본채 남쪽 기둥 모서리를 돌아서면 모퉁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본채 남쪽 처마 밑으로는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나 있었다. 장정은 머리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빗살문이었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남향으로 나 있어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문간에서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꿰매는 일을 하시고는 하셨다. 처마 밑으로는 쇠죽솥 아궁이에 땔감으로 쓸 장작을 가지런히 천정까지 쌓아 놓았다. 모퉁이 담장 아래에는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는 나뭇가리가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가을 낙엽 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마을 장정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나무 짐을 해 왔다. 행정에서는 점점 민둥산이 되어 가는 벌거벗은 산을 지키기 위해 산림녹화를 외치면서 산에 나무를 심었고, 산림계를 나무 짐 길목에 지켜 서서 단속하고는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전기나 기름이 없던 시절이라 온전히 땔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채에는 방이 큰방과 작은방 두 개가 있었다. 큰방은 여덟 자, 작은방은 여섯 자 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장방이라 하는 2평 남짓한 방이 작은방 뒤로 붙어 있었다. 이 도장방에는 종자나 양식, 집안의 중요한 물건과 놋쇠 그릇이 시렁에 올려져 있었다. 지붕은 산죽과 억새를 장안산 깊은 골에서 실어 와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렸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무겁고 반영구적이지 못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모두 함석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말았다.

농토가 없는 아버지 어머니는 눈만 뜨면 논과 밭으로 나가고 달이 뜨고 별이 돋아야만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밤길에 큰재를 넘다 늑대 무리를 만나 혼이 빠져 사나흘 시름시름 앓다 서른일곱에 돌아가셨다 한다. 일찍 과부가 되어 버린 할머니는 칠 남매 손주를 혼자 등으로 업어 키우셨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본 기억은 도무지 없고, 할머니 품에서들 자랐으니 할머니 남겨 둔 정이 어떠했으랴!

집주인 모두 떠나고, 굴삭기 한 방에 옛 모습을 잃어버린 오래된 옛집이 서럽게 서럽게 그리워지는 것은 어린 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박물관처럼 남겨져 있고 나의 유년이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이 그리워지고 까까머리 친구가 보고 싶어지는 것은 옛집과 골목길과 들판을 개구쟁이처럼 휘젓고 다니던 그 시절이 추억으로 새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따라 옛친구가 더 보고 싶어진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6년 10월 29일
- Copyrights ⓒ주)전라매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오피니언
칼럼 기고
가장 많이본 뉴스
오늘 주간 월간
기획특집
정읍, 지원금부터 상권 혁신까지 민생경제 선순환 이끈다  
곰소만의 깊은 맛, 줄포대박젓갈에서 만나다  
제4회 김제 자원순환 새로보미 축제 10월 30일 개막  
장수군 민선9기 출범 100일, 성과를 잇고 군민이 체감하는 변화로  
대한민국 농업수도 과학으로 미래를 심다  
민생부터 첨단산업까지… 김제시, 국가예산 대응 총력  
익산 천만송이 국화가 새롭게 활짝 핍니다  
노을이 무대가 되고, 바다가 축제가 된다  
포토뉴스
전북문화관광재단, 베트남 관광시장 공략 본격화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이 베트남 현지 여행업계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전북 관광상품 개발과 해외 관광객 유치 확대에 나섰다.전북문화관광재단은  
전주국제영화제 화제작 21편, 서울서 다시 만난다
올봄 전주국제영화제를 빛낸 국내외 화제작들이 오는 11월 서울 관객들과 다시 만난다.전주국제영화제(공동집행위원장 민성욱·정준호)는 제27회 영 
전주문화재단, 한·중·일 전통종이 교류 ‘삼국지향’ 성료
전주문화재단이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전통종이 청년 장인들이 참여하는 국제교류 행사를 열고 전통 제지기술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협력 기반을 마련 
한국전통문화전당, 특별한 결혼식 무대로 변신
한국전통문화전당이 특별한 결혼식 공간으로 변신해 신랑과 신부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했다.지난 24일 한국전통문화전당 실내 공연장에서는 가족과 친 
남원서 해금의 깊은 선율 만난다… ‘산조+더하기Ⅱ’ 공연
해금 특유의 애절한 선율과 전통 악기들의 조화로운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국악 공연이 남원에서 펼쳐진다.국립민속국악원은 오는 11월 7일 오후 
편집규약 윤리강령 개인정보취급방침 구독신청 기사제보 제휴문의 광고문의 고충처리인제도 청소년보호정책
상호: 주)전라매일신문 /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228. 501호 / mail: jlmi1400@hanmail.net
발행·편집인: 홍성일 / Tel: 063-287-1400 / Fax: 063-287-1403
청탁방지담당: 이강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미숙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전북,가00018 / 등록일 :2010년 3월 8일
Copyright ⓒ 주)전라매일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