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구속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7월 28일
정성수 객원 논설위원/명예문학박사
어린 시절, 시골 동네 어디선가 들려오던“워리!”라는 정겨운 외침이 기억의 저편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때의 개들은 이름조차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털 색깔에 따라 바둑이나 누렁이나 검둥이 아니면 통칭‘똥개’라 불리던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대문도 없는 마당을 제집 안방처럼 누비고, 동네 어귀까지 마실을 나갔다가 해 질 녘이면 꼬리를 흔들며 돌아오곤 했다. 주인에게 야단을 맞을 때면 전라도 사투리로“저 가이!”하는 호통 한 마디에 쏜살같이 달아나 자취를 감추었다가도, 밥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때의 개들에게는‘자유’라는 것이 실재했다. 비록 끼니마다 주인이 먹다 남은 밥이 섞인 잔반을 먹었을지언정, 그들은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았다. 낮에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쥐를 찾거나 나비와 장난을 쳤고,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 동네 개들과 어울려 짖어대며 영역을 확인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야생의 활기와 생명력이 넘실거렸다. 스스로의 의지로 한 걸음을 내딛는 존재로서의 당당함이 있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고단함은 있었으나, 적어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았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했다. 이제 개는 가족의 구성원인‘반려견’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얻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전용 미용실에서 털을 가꾼다. 사람이 먹는 음식보다 비싼 영양식을 먹는다. 그러나 안락한 삶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려견들의 목에는 예외 없이‘리드줄’이라는 이름의 굴레가 감겼다. 현대의 반려견은 전적으로 주인의 의지와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주인이 줄을 짧게 잡고 앞세우면 상전이라도 모시듯 앞장서야 하고, 주인이 멈춰 서면 저 너머에 매혹적인 냄새가 나더라도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가기 싫어 엉덩이를 뒤로 빼며 버텨도 팽팽해진 줄에 이끌려 억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풍족한 먹이와 천적 없는 안전한 안식처를 얻은 대신, 자신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빠르게 걸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인 이동의 자유를 반납한 셈이다. 이는 인간이 제공하는 복지와 안전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된 정교한 구속 형태이다. 자유와 구속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노자老子는 그의 철학에서‘소국과민小國寡民(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상태)’의 이상향을 설파하며, 이웃 나라의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 않는 상태를 최상의 삶으로 꼽았다. 이는 외부의 불필요한 간섭과 관계로부터 해방된 절대적 자유를 뜻하기도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철저히 고립된 채 시스템 안에 갇힌 구속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자유의 가치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고사 중 장자莊子의‘학경지탄鶴頸之歎’이 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해서 그것을 인위적으로 자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사물의 타고난 본성을 억지로 꺾거나 구속하지 말라는 통찰은 현대의 반려 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당을 뛰놀던 옛날의 똥개들이 학처럼 긴 다리를 마음껏 휘저으며 본성대로 대지를 달렸다면, 오늘날 리드줄에 묶인 채 정해진 길만 오가는 반려견들은 인간의 편의와 도시의 질서라는 이름하에 본연의 야성이 거세된 상태라 볼 수 있다. 그들은 짖고 싶을 때 짖지 못한다. 뛰고 싶을 때 뛰지 못하는 세련된 수인囚人이 된 것이다. 또한, 호의호식이 과연 구속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지도 엄중히 따져봐야 한다. 서양 속담에는 “황금 새장 속의 새는 노래하지 않는다”는 명언이 있다. 새장에 아무리 화려한 금박을 입히고 귀한 모이를 채워 넣어 준다 한들, 새에게 그곳은 하늘을 잃어버린 감옥일 뿐이다. 반려견이 누리는 온갖 문명의 이기들은 어쩌면 인간의 이기적인 대리 만족일 뿐, 개의 처지에서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빗물을 마시던 시절의 해방감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안락함은 생존을 보장하지만, 자유는 영혼을 숨 쉬게 한다. 이러한 비유는 비단 동물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인들 역시 문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정교하게 설계된 리드줄에 묶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삶은 육체적으로 고되고 물질적으로 빈곤했으나, 대자연과 호흡하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기 주도적인 삶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본과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주인에게 자신의 목줄을 맡기고 있다. 우리는 안정된 직장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안락한 주거라는 달콤한 먹이를 보장받기 위해 보이지 않는 리드줄에 끌려다닌다. 주인이 줄을 당기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일이라도 수행해야 하고, 주인이 멈추라고 명령하면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정보화 시대의 자유인이라 거들먹거리지만, 사실은 스마트폰과 알고리즘과 자본의 논리라는 자발적 구속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현대적인 우울과 허무는 어쩌면 리드줄이 목을 조여올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일 것이다. 어느 시골 마당에서 똥개라는 매정한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산 너머로 달려가던 개의 뒷모습은 초라했을지언정 더없이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에게는 배고픔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야성이 살아 있었다. 반면, 값비싼 옷을 입고 주인의 발걸음에 맞춰 기계적으로 걷는 반려견은 외형적으로 우아해 보이지만 지극히 수동적이며 의존적이다. 자유에는 반드시 고독과 책임, 그리고 위험이 수반된다. 반대로 구속에는 안전과 안락과 타인에 의한 보살핌이 담보된다. 이 두 가치 중 무엇이 절대적으로 더 낫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목에 감긴 리드줄의 존재를 명확히 자각하는 일이다.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때, 인간은 비로소 주체성을 잃은 가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우리를 억죄고 있는 사회적 리드줄을 느슨하게 풀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본연의 나로 돌아가 마음의 들판을 자유롭게 질주하고 싶어 하는 내면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르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가기 싫으면 달아날 수 있었던 시절의 순수한 자유를 삶의 일부로 초대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행복은 가득 채워진 배부른 사료 그릇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가시밭길일지라도 내가 내 발로 어디로 갈지 결정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는 한 걸음의 권리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자유와 구속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워리가 누렸던 소박하지만 위대한 해방감을 복원해야 한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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