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 새것의 경계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10월 14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세간살이 비워 낸 허연 거죽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초가삼간, 모진 비바람과 궂은 세월 버텨 온 옛집이 굴착기 한 방에 지붕과 대들보마저 맥 한번 못 추고 폭탄 맞은 듯 폭삭 주저앉는다. 아버지 운명하셨다는 비보처럼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들에게 기둥과 대들보와 서까래는 아버지였고 바람벽과 구들장은 어머니 그 자체였다. 방황과 좌절의 시간, 세상의 따갑고 차가운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말없이 품어 주고 토닥거려 주던 오지랖 넓은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칠 남매의 태자리에 아스라한 추억과 유년의 이야기가 동화처럼 살고 있고, 한자리에 모이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향 집에 대한 어릴 적 이야기가 보따리를 풀어놓은 듯 줄줄이 꼬리를 물었다. 밤을 지새우게 하는 추억의 보물창고였던 정든 집이었기에 허전함과 미련이 더 컸을 것이다. 고향 시골집은 늘 옛것과 새것의 경계에서 안락함과 불편함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도시에서 사는 자녀들이 여름 한 철이나 명절 때 오래된 시골집에 오면, 기대와는 달리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방이 비좁아 잠자리가 불편했고 보일러가 없어 겨울날 아침에 세면을 하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그것도 모자라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화장실도 하나이기에 먼저 일어나면 우선 화장실 먼저 가서 볼일을 미리 봐 두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어른들은 알아서 눈치껏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만 네댓 살 아이들에게 마당도 아닌 삽작 문간에 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큰일을 보고자 할 때는 배가 아플 때까지 참고 견디다가 참다못한 녀석은 울음보를 터트리기도 하고 징징거리며 집에 가자고 엄마 아빠를 성가시게 했다. 그러니 아들이나 딸이 하룻밤 자고 가려고 해도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저녁만 먹고도 도망치듯 시골집을 나서는 어이없는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명절이 되면 이런 불편함은 더욱 심해진다. 밥도 두 번씩 나누어 먹어야 한다. 먼저 남자 어른들과 아이들이 한 번 먹고 나가면 다시 상을 차려 여자들이 먹는다. 잠자리도 주방까지 차지하고 늦게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비좁은 틈을 비집고 새우잠을 잔다. 큰방은 할머님을 비롯한 여자들이 윗방은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잔다. 칠 남매가 장성하면서 모퉁이 뒤주를 헐어 방을 들여 공간을 늘렸지만, 장손인 형님이 결혼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한 이불 다동이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불편하기에 일부는 읍내에 사는 조카 집에 가서 자고 오고, 누구는 아이들 핑계 삼아 명절 당일 아침에 일찍 와서 조상님 모시고 성묘하면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만주로 이주해 살다가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고향 장수로 돌아오셨다. 개성에서 길이 막혀 사흘 낮 밤을 걸어 빈 몸으로 고향에 들어오셨으니 오갈 데가 없었다. 기거할 곳이 없어 친척 집 어느 아래채 문간방에서 오막살이를 하던 아버지는 삼대독자 어린 가장이 되어 장작 장사를 시작했다.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이고 십 리가 되는 장터 길로 지게 짐을 하고 다녀오면 새벽닭이 울었다. 이 옛집은 아버지 열여덟 되던 해 인근의 목수를 들여 이 집을 지었다 했다. 애초에는 본채만 있었고 아래채는 그 후에 지었다는데 태어나기 전이라 기억에 없다. 다만 행랑채는 그 후 1960년대 후반쯤 지은 기억이 난다. 본채에는 여덟 자 방이 큰방과 윗방으로 두 개 있었고 마루를 지나 큰방 쪽으로 정지라 부르는 부엌이 있었다. 무쇠솥을 두 개 걸어 놓은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 맞은쪽에는 가름대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놓은 살강이 아래위 두 단으로 벽에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어머니 전유물인 항아리와 물동이가 또바리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삐거덕거리는 정지문을 열면 작은 허청이 있고 땔감과 갈퀴나무가 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부엌에서 불장난하다 나뭇더미에 불이 옮겨붙어 세간을 다 태워 버리는 불상사가 소문을 타기도 했다. 연탄이 보급되고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부엌 개량이 시작되었고, 기름보일러가 들어오면서 정지가 부엌이란 이름을 달고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뭇가리가 없어지고 전기와 기름으로 냉난방과 취사를 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를 맞이하였지만, 그런들 시골의 생활양식이 도회지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우물 대신에 수도꼭지가 달리고, 빨래터 대신 세탁기가 들어오고, 아궁이 연기에 매운 눈물을 흘리던 부엌조차 집 안으로 들어왔지만, 유독 큰일 보는 화장실만은 내어놓은 자식처럼 마당도 아닌 대문 밖에 그대로 유물처럼 남아 있어야만 했다. 아마도 고지식한 옛 어른들이 뒷간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을 터부시하거나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어느덧 그 많던 칠 남매가 저마다 결혼하여 자식 낳고 출가하고 나니 형님 내외분만 시골집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면서 장성한 조카들까지 젊은 날 고생하셨으니 불편한 옛집을 헐고 다시 지으라 성화를 대기 시작했다. 형님 내외도 생각은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아버지가 지으셨고 칠 남매를 낳고 길러 준 태자리였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더욱이 타지 한 번 나가 보지 못하고 붙박이처럼 옛집에 오래 살아 온 형님에게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의 반 타의 반 새집을 짓기로 한 것이다. 집안 구석구석 쌓여 있는 묵은 살림이 얼마나 많은지 정리를 하는 데 끝이 없다. 창고 겸 곳간으로 쓰고 있던 아래채에서는 장대며 못자리판이며, 곡식 말리던 덕석 등 시대가 변하여 쓰지 않고 보관해 두었던 생활 도구와 오래 묵은 별별 살림들이 끊임없이 들려 나왔다. 쉬지 않고 나오는 지난날의 흔적과 유물을 보면서, “이런 걸 지금까지 보물단지처럼 쟁여 두고 있었네” 하면서 쓸모없어진 물건들을 보며 헛웃음을 치기도 하고, 기억 속에 희미해진 옛것을 보고서는 무슨 금덩어리라도 만난 듯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헛간 구석에서 구멍 숭숭한 등받이에 검버섯까지 핀 뼈만 남은 지게를 발견하고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평생을 오롯이 지게 등짐으로 칠 남매 키워 내셨던 유일한 버팀목 아니었던가. 두 분이 남겨 둔 연장과 세간살이를 보면서 잠시 우리는 옛 기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두 분이 살아 온 흔적과 유물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는 숙제로 남겨 두기로 했다. 조카들은 그러한 유물이나 옛 소품들을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보관해 두느냐며 쓸모없는 잡동사니나 쓰레기 취급을 하지만, 가난과 설움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가 어찌 그 안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으랴. 겪어 보고 느껴 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이고 향수이며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넘어 가난하고 부족한 시대를 살아 온 우리에게는 금쪽보다 더 귀한 추억이고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일지라도 유독 배고프고 서럽던 시간의 기억들만 추억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현듯 옛것과 새것의 경계에서 남은 자의 생각이 깊어진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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