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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요일별 특집

<김동수 자전적 에세이> 교룡산성23. 업을 잃어버린 시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26일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구렁이나 두꺼비들을 신성시하여 한 집안의 살림을 보호하고 늘게 해주는 ‘업’이라 칭하면서 집안의 보호신으로 극진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내 어렸을 적만 해도 집안에 큰 구렁이나 두꺼비가 나타나면 업이 나간다 하여 어른들께서는 매우 불안스런 표정으로 아이들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조심스레 맞이해 드렸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한 민속신앙들이 서양의 물질문화에 밀리어 차츰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까맣게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해 가을이었다. 남원 역전 음식점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밖에 나갔던 주인 할머니가 정색을 하면서 들어오더니 교룡산성에 큰 구렁이가 하나 살고 있는 데 어찌나 크던지 땅군들도 지레 겁을 먹고 잡을 생각을 않는다며 무슨 큰 비밀이나 발설을 하는 양 조심스레 소곤거리고 있었다.  옳거니, 세상은 이상기류를 타고 제멋대로 흘러가건만 그래도 아직 우리네 핏속에는 보지 않고도 믿어 왔던 조상들의 민속신앙이 어느 한 구석에는 남아 흐르고 있구나.  마치 오래토록 잃었던 가보(家寶)를 되찾았을 때처럼 난 그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그 후부터 내 뇌리에는 그 구렁이의 형상이 오래토록 떠나질 않았다. 마치 늙으막에 젊은 손주놈들에게 살림을 넘기고 뒷전에 나앉아 쓸쓸히 여생을 보내는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같은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
갈수록 우리네 미풍양속들은 사라져 간다. 붕붕대는 서양문명의 그늘 속에서 쑥대처럼 웃자라 사유(思惟)와 인정의 샘이 메말라 가는 세태에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아직도 어느 한 구석에서 이처럼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는 게 여간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때의 충격을 모티브로 하여 지어본 게 「교룡산성」이란 시였다.

희뿌연 안개 서기(瑞氣)처럼 깔리는 구렁, 새롬새롬 객사기둥만한 몸뚱어리를 언뜻 언뜻 틀고 눈을 감은 겐지 뜬 겐지 바깥소문을 바람결에 들은 겐지 못 들은 겐지 어쩌 면 단군 하나씨 때부터 숨어 살아온 능구렁이. 
보지 않고도 섬겨왔던 조상의 미덕 속에 옥중 춘향이는 되살아나고 죽었다던 동학군들도 늠름히 남원골을 지나가고, 잠들지 못한 교룡산성의 능구렁이도 몇점의 절규로 해 넘어간 주막에 제 이름을 부려놓고 있다. 
어느 파장(罷場) 무렵, 거나한 촌로(村老)에게 바람결에 스쳐 들었다는 남원 객사 앞 순대국집 할매, 동네 아해들은 휘동그래 껌벅 아고, 젊은 녀석들은 그저 헤헤 지나쳐 가건만, 넌지시 어깨 너머로 엿듣던 백발 하나 실로 그의 하얗게 센 수염보다도 근엄한 기침을 날린다.
산성 후미진 구렁 속, 천년도 더 살아있는 능구렁이, 소문은 슬금슬금 섬진강의 물줄기를 타고 나가 오늘도 피멍진 남녘의 역사 위에 또아리 치고 있다.
- 김동수. 「교룡산성」 전문, 1982년

남들은 어떻게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오늘 날 우리 사회가 과학적이고 물질주의에 만연되어 있다 할지라도 역사의 뒤곁으로 물러나 있는 저 교룡산성의 능구렁이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삼라만상이 꽁꽁 얼어붙은 동토(凍土)에서도 우리의 핏줄처럼 다순 지하수가 흐르고 있기에, 새봄이 오면 초목들이 무성히 움터 오듯, 비록 바람 탄 오늘의 역사라 할지라도 어찌 시대의 뒤란에서 고동치고 있는 저 소리 없는 소리들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잠들지 못한 동학군들의 함성과 성벽을 베개 삼아 남원산성을 지키려다 장렬하게 순국하신 만인의총(萬人義塚)의 원혼들이 어쩌면 저 남원산성 후미진 구렁에서 가뭄탄 오늘의 세상을 근심하며 괴로와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주제넘게도 오늘을 근심하며 나는 한 점의 바람으로 서 있다.(1982년)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4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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