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동 145번지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11월 04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금암 2동 거북이 마을 끝자락, 갈지자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숨이차도록올라가다보면골목끄트머리대문없는 회색빛 외딴집 잡초와 가시덤불이 지붕 서까래를 덮고, 야트막한 처마는 바닥에 코가 닿을 듯 숨죽여 엎드려 있던 곳, 금암동 145번ㅋ지 스물일곱 살 적 신혼집이거기있다.금암동을떠나송천동과효자동멀리는장수를떠 돌다 40년만에 금암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 발을 들여 놓기전에 사십여 년 전에 살았던 옛집이 생각나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찾아본다. 골목이 막히고 새집이 들어서고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분간할 수는 없지만, 언덕배기 바로 아래 묵정밭 같은 흔적이 옛 집터임을 짐작게 한다. 어찌 보면 전주시에서는 하늘 아래 첫 동네인 곳, 모래내 시장과 서노송동 그리고 시청과 팔달로가 훤히 내려 보이는 거북바위 바로 옆집이다. 서노송동 2층 옥탑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이라기보다 는 동생 둘과 친인척 동생 둘이 와 있으니, 하숙집 같은 분위기였다. 큰아이를 낳고 아래층 주인댁보다 우리 이층집 식구가 훨씬 많으니 주인댁에 제일 미안하고 부담스러운 일은 1층 현관 입구에 있는 화장실 사용 문제였다. 다행히도 주인댁의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마음이 좋으셔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안함과 불편함을 감출 수 없어 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동생과 처남이 덕진에 있는 전북대학교 입학을 한 터라 될 수 있는 대로 대학 근처로 가까이 가기로 했다. 아울러 방이 여럿인 주택을 찾아보기로 했다. 금암동 일대를 수소문하고 복덕방을 거치는 동안 금암동 145번지 비탈진 골목의 맨 끄트머리, 대문도 문패도 없는 방 4개짜리 독채를 얻어 이사를 했다. 집 뒤로 골목을 따라온 길 꼬리가 이십여 미터를 기어오르다 보면 전 KBS 전주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금암도서관이 새로운 건물로 웅장하게 서 있었다. 이삿짐은 모래내 시장 쪽에서 올라오는 골목길이 좁아 이삿짐 용달차가 들어올 수 없어 금암 로터리에서 금암 아파트를 돌아 도서관으로 올라오는 길을 택했다. 말하자면 집 뒤 언덕에서 이삿짐을 온 식구가 손으로 메어 날랐다. 장롱이고 책상이고 이불이며 옷가지까지 비탈을 오르내리며 짐을 날랐다. 좁은 마당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어 평 정도 되는 수돗가가 있고 수돗가에서 곧바로 부엌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방이 많아 좋기는 하였으나 방이 많을수록 연탄 아궁이도 많아 매일 연탄을 갈고 아침마다 연탄재를 버리는 일이 추가되었다. 골목이 비좁고 비탈이 심해 연탄재를 수거하는 청소부 아저씨의 손수레가 올라올 수 없었다. 아침마다 딸랑딸랑 청소부 아저씨의 종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비료 포대에 연탄재를안고삼십여미터를뛰어내려갔다. 아침마다 연탄재를 버리는 일은 오로지 가장인 나의 몫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옆집에 중년의 부부가 살았는데 사흘이 멀다 부부싸움이 잦았다. 듣기 힘든 남자의 고함과 막말이 날아가고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와 비명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받아쳤다. 그런 날이면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근무지인 진안으로 원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모래내에서 버스를 타고 진안으로 통근을 1년 정도 하고 있었다. 그 해 연말이 다가오면서 일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집에서 회사로 오가는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피곤하다는 명분과 승진 시험 준비한다는 핑계로 진안에서 방을 한 칸 얻어 주말만 집을 오가며 별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내는 둘째를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이월 초순이었다. 아랫집 할머니께서 회사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가 둘째를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퇴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장모님이 익산에서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와 아내를 돌보고 있었다. 아내는 병원 갈 겨를도 없이 출산이 임박해지자 본인이 손수 출산 준비를 하고 분만을 했다.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지라 아랫집 할머니께서 달려오셔서 도와주셨고 익산 장모님과 진안 회사로 전화를 넣어 주신 것이다. 아내에게 죄인처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수 물을 끓여 가위를 소독하고 손수 탯줄을 자르고 했던 아내가 담대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태어난 둘째는 마냥 껌딱지처럼 엄마를 붙어 다녔다. 한시도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모래내 시장을 다녀올라치면 출산 전에는 큰애를 등에 태중의 둘째는 앞으로 안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비탈을 오르내렸다. 둘째가 태어나자 이제는 둘째를 업고 큰아이의 손을 잡고 시장길을 다녔다. 올라오는 비탈길이 힘들다고 큰아이가 떼를 쓰면 큰애를 업고 작은 애를 앞으로 메고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비탈을 올랐다. 함께 사는 식구가많아 수돗가에서 손으로 빨래한 다음짤순이로 물기를 대충 털어내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대문이 없는 길갓집이다 보니 어떤 날은 바지가 사라지는일도 있고 저고리가 없어지는 일도 있었다. 대문이 없는 골목 외딴집이라 생기는 불상사였다. 어떤 날은 술 한잔 걸친 나그네가 문간방에 들어와 자기집인양 방에 들어와자고가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아랫집 할머니를 대동해 내보내고는 했다. 그 옛집에서의 기억 중에 아프고 고단한 기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월이 시작될 무렵 대문을 들어서면 붉은 덩굴장미가 앞 담벼락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처럼 탐스럽고 화려한 장미 그림을 본 적이 없다. 마치 퇴근길 고단함을 씻어 주는 듯 피로 해소제 같은 거였다. 기억을 더듬어 주변을 살펴본다. 행여 옛 기억 속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골목이 막히고 집터만 남아있다. 너무 경사가 가파르게 되어 있어 오래된 낡은 주택이 헐리고 손바닥만 한 공터로 남아 누군가의 텃밭처럼 남아있다. 내 생애에 단독주택을 통째로 전세로 살아 본 유일한 기억이 여기 있다. 고단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지만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고 그립도록 생각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정을 이루고 이삿짐을 옮긴 횟수가 여덟 번이다. 그 많은 전셋집 중에서 유독 금암동 145번지가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힘들고 고단한 생의 모서리가 숨겨져 있기라 도 한 것일까. 아직도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 시간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옛 생각에 잠겨 본다. 꽃같이 예쁜 아내가 두 아이와 함께 환히 웃고 있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5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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