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베푼 대로 받는 법이여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2월 08일
유인봉 시인 / 수필가
음력팔월 스무엿새날은 아흔 여섯하고도 열달을 살다가 신할머니 제삿날이다. 구구팔팔은 아닐지라도 운명하시기딱 한 달만 식음 전폐하고 누워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에도 숨소리까지 조용하셨던 분이라 자는 듯이 이승의 삶을 마치셨다. 칠 남매가 다 모이니 생전에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그중에서도 생일이 같은 날인 여섯째 여동생이 유난히 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중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주민등록 앞자리 숫자가 모두 000000 – 으로 되어 있었다. 1800년대 출생이기에 1900년부터 시작된 주민등록번호생년월일자릿수가없다. 천천면 소재지 부잣집 박씨집안의 딸이었던 할머니가 가난하기 짝이 없었던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온 사연은 알수가 없다. 어렵고 서러운 일제 치하에서 전답조차 없는 세간 살림을 견디지 못하고 북간도 한민족 이주 시기에 만주벌판으로 옮겨 가 살았다. 그곳에서 강냉이밭 화전을 일구고 근근이 살다가 해방이 되자 1·4후퇴 때 만주 봉천역에서 피난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38선에 가로막혀 개성에서 열차가 멈추자 아버지와 두 분 고모님을 데리고 엿새 날밤을 걷고 걸어 고향 땅 장수에 도착하셨다. 오시자마자 할아버지께서 서른일곱에 큰 재를 넘다 늑대의 습격을 받고 밤새 전투를 벌이시다 혼절하다시피 집에 들어오셨지만, 그 후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 만에 운명하시었다. 할머니는 늑대에게 혼을 빼앗겨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린 할머니는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아버지와 고모들을 키워 내셨다. 삼대독자인 아버지께서는 열여덟에 시집오신 어머니와 함께 형님을 낳으셨다. 그러나 낳으시기만 하셨지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만 하셨던 분들이었기에 형님을 비롯한 우리 칠 남매는 할머니 등에서 자랐다 해도 빈말이 아니다. 부모님 등에 업혀본 것은 초등학교 이학년쯤 몸이 아파 전주 큰 병원 갈 때 아버지 등에 업혀본 외에는 기억이 없다. 어머니 등에도 업혀본 기억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잠도 같이 자고 마실 가는 길에도 늘 우리를 데리고 다니셨다. 할머니는 긴긴 겨울밤이면 화롯불을 피워놓고 기다란 담뱃대에 뻐끔담배를 태우시며 밤이 깊도록 살아오신 굴곡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화롯불에 묻어둔 군밤이 톡톡하며 배꼽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 시절엔 눈도 그리 많이 내렸다. 어떤 날은 장독에 담아놓았던 홍시를 한 접시 내어 가지고 오셨고, 어떤 날은 독에 재워둔 고욤을 한 종발 퍼 오시기도 하셨다. 돈으로 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겨울밤 간식은 물고구마에 동치미 국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달콤한 홍시나 고욤 재운 것은 더없는 귀한 간식거리였다. 늦가을 주워다 모은 밤톨을 촉촉한 모래 흙을 담은 독 안에 보관해 두었다가, 긴긴 겨울밤 호롱불 아래 화롯불에 구워낸 군밤을 먹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가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 머리맡에는 늘 콩나물 동이가 놓여 있어 틈만 나면 콩나물 머리에 물을 뿌려 주셨다. 먹을 거리는 대부분 자급자족하던 시절이라 콩나물을 무침이나 국을 끓이는 데 뿐만 아니라, 쌀이 귀한 시절이라 고구마를 썰어 넣고 콩나물을 머리에서 뿌리까지 통째로 넣어 끓인 콩나물죽은 가난한 짐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한 끼의 식사였다. 기억 속의 할머니는 목청이 좋아서 집 앞 높은 둑에 올라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 저 멀리 아랫담에서도 부르는소리를 듣고 집으로 달려오고는 했다. 또한 총기가 좋아 가가호호 누구누구네 제삿날을 죄다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주인 내가 군을 제대한 후에도 전주에서 나와 동생들 밥을 해주며 함께 사셨다. 아흔다섯까지 함께 살면서 동네 어른들과 함께 전주 인근 콩밭 김을 매러 다니셨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심하게 더위를 먹고 병원 신세를 진 후로는 시골 본가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어느 해 늦여름 뜰방에서 넘어지면서 무릎 골절로 마지막으로 침대 생활을 한 달 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할머니는 평소에 인정이 많으셨다. 그 어려운 가난이 일상이었던 시절 마을에 방물장수가 오면 누구도 잠자리 내주기를 외면했다. 모두 마을 끝에 있는 상지 담 우리 집으로 올려보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그들에게 예외 없이 저녁을 대접하고 잠자리를 마련하여 재워 보냈다. 아침이면 방물장수들도 미안해서인지 조반은 사양하고 일찍 갈 길을 떠났다. 가면서 얼개 빗이나 동동 구루무를 주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훗날 시골 어르신들께서는 우리 칠 남매가 나름 괜찮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다 베푼 대로 받는 법이여”라며 할머니께서 생전에 인정을 많이 베푸신 덕분이라고 말씀들 하시고는 했다. 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고 많은 것은 웬일일까. 그만큼 내리사랑이 크고 함께 했던 시간이 많다는 뜻이겠다. 아흔여섯 십 개월을 사신 앨범 속 사진을 꺼내 들고 할머니를 불러본다. 사진 속 할머니가 말문을 열고 금방이라도 이름을 불러 주실 것 같다. 생전의 할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입력 : 2026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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