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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천도 동기와 ‘전주선언’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22년 02월 09일
ⓒ e-전라매일
왜 전주인가?
백제를 부활시킨 진훤, 교과서 표기의 견훤은 왜 전주로 천도했을까? (‘진훤’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 호에 소개한다.) 신라군 비장(裨將)이었던 진훤은 889년에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비장하면 흔히 조선 후기의 아전 소설 ‘배비장전’을 연상한다. 그러나 진훤은 건국 후, 지금의 강원도 서부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 중부 지역 대호족이었던 양길에게 비장 직을 내려주었다. 이로 볼 때 비장은 지체 높은 사령관 직이었다. 그는 892년에 광주를 거점으로 백제를 재건했다. 그랬기에 광주 광역시에는 지금도 ‘진훤대’ 같은 전설을 품은 지명이 남아 있다.
광주 광역시에 소재한 무진고성을 사서에서는 ‘무진도독성’으로 적어놓기도 했다. 후백제 말기에 진훤 왕의 둘째아들 용검이 도독이었던 무주(무진주)의 치소(治所)였다.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백제를 재건한 진훤은, 8년 후 전주 천도를 단행했다. 당시 국호는 ‘후백제’가 아니라 ‘백제’였다. 백제를 부활시킨 진훤으로서는 정체성 확립이 긴요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구도(舊都)의 장악이 선결돼야 했다. 고구려를 부활시킨 궁예도 잡초만 무성하고 짐승만 뛰어다니는 처참한 평양 구도를 상기하면서 복수 선언을 했다.
진훤은 백제 구도를 꼽아 보았을 것이다. 통일신라인들 기억 속에는 한강 이북 즉 삼각산 이북은 고구려, 그 이남은 백제라는 강역 의식이 지배했다. 물론 한반도 최남단 순천만에서 출발한 그가, 백제 한성이 소재했던 지금의 서울 송파구나 경기도 하남시 일원까지 진출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왕규(王規) 같은 강력한 호족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 구도로는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이 존재했다. 공주는 공주장군 홍기라는 호족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는 김헌창 반란의 거점으로 역향(逆鄕)이었고, 지덕(地德)이 이미 쇠한 곳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부여는 의자왕이 처참하게 항복 의식을 치른 멸도(滅都)였다. 반면 백제 말기 부여와 더불어 수도를 구성했던 익산은 미래가 남아 있는 국도였고, 연접한 남쪽의 전주까지 확장이 가능했다. 실제 전주 남고산성이나 동고산성에서는 익산 미륵산(높이 430m) 즉 금마산이 지척처럼 느껴진다(금마면 동고도리 금마산은 높이 115.6m에 불과해 개국의 상징적 산악이 되기는 어렵다).
멀리 금마산(미륵산)을 주산으로 한 전주 지역은, 선박이 나가는 행주형(行舟形) 지형이었다. 관련해 진훤은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 후기 도성인 장안성도 행주형 지형이었다. 행주형 지형은 재물이 몰려온다는 길지(吉地)로 여겨졌다. 진훤으로서는 당에 유학한 고승이나 유학자들을 통해 풍수상에서 전주 지역을 타진했을 것이다. 백제 구도 ‘금마산’과 연계된 전주 지역은, 새 나라의 새 수도로서 적격이었다.
889년에 거병해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진훤이었다. 진훤은 나라를 세웠지만 ‘스스로 왕(自王)’이라고 했을 뿐이다. 조선 태조도 건국 2년 후인 1394년에도 ‘조선’ 국호도 사용하지 못했고, “감히 왕을 일컫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조선이 개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진훤은 ‘삼국유사’ 왕력(후백제)에서 “임자(892)에 처음 광주에 도읍했다”고 했는데, 이때부터 전주를 의식했던 것 같다.
892년에 그가 자칭한 길게 늘어진 벼슬 이름 가운데 ‘전·무·공등제군사(全·武·公等州軍事)·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만 보더라도, 전주·무주·공주에 대한 군정권 장악과 더불어, 통치 거점으로는 전주를 염두에 두었다. 진훤의 뇌리에는 전주 입도(立都)가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당초 광주를 수도로 잡은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진훤으로서는 오월국을 비롯한 중국과의 교류에 명운을 건 상태였다. 정권의 국제적 정당성 확보와 더불어, 신라보다 정치적으로 우월한 입지 구축 차원에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주 회진항이나 영암 쪽과 지리적으로 근접한 광주가 유리했다. 그렇지만 진훤은 처음부터 광주 지역에 영구 정착할 의도는 없었다고 본다.
ⓒ e-전라매일

전주 천도의 동기
진훤은 광주에 입도한 지 8년 후 전주 천도를 단행했다. 오랫 동안 품었던 꿈이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전주 천도의 동기는 앞서 언급했던 백제 구도 익산 금마산과 엮어진 풍수지리적 길지 외에도 몇 가지 사유가 있었다. 영산강유역의 광주 일대는 마한의 고지(故地)였다. 백제에 가장 늦게 복속된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백제에 대한 귀속 의식이 노령산맥 이북 전주 일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리고 국가의 중심축을 북상시키는 게 정국을 주도하는데 유리했다. 그 밖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을 장악해 정치적으로 우월한 입지를 구축해 신라를 압박하려는 전략이었다. 진훤은 북원경(원주)의 대호족 양길과 손을 잡아, 양길 예하의 서원경(청주)과 국원경(충주)까지 포함하면, 5소경 가운데 4소경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면 후백제와 신라의 1대1 구도에서 상당히 유리하고 우월한 입지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신라를 압박해 선양(禪讓) 받으려는 구상의 실현이 가능해 질 수 있다. 후백제가 일찍부터 진출을 시도해 결국 금관경(김해)을 장악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장계분지와 운봉고원의 막대한 제철산지 확보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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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선언
진훤이 국토의 서부 지역을 순행하던 중 완산주(전주)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때 주민(州民)들이 진훤의 노고를 위로하며 맞이했다[迎勞]. 진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완산주에서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자 “지금 나는 감연히 완산에 도읍해 의자(義慈)의 숙분을 씻겠노라”고 전주 천도와 더불어, 자신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천명했다. 얼핏 보면 주민들의 환영에 고무된 즉흥적인 결단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진훤의 ‘전주선언’은 잘 짜여진 구성이었다. 결단코 즉흥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전주선언’에는 진훤의 정국 지향점이 명시돼 있다. 따라서 잘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의 ‘전주선언’에서 오역(誤譯)이 심한 a의 일부 구절은 원문을 게재했다.

a.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해 6백여 년이었다.
b. 총장 연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이 바다를 건너고 신라 김유신이 권토(卷土)해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병과 더불어 합공해 이들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c. 지금 나는 감연히 완산(完山)에 도읍해 의자의 숙분을 씻겠노라!

위의 3 단락 가운데 a는 영광스러웠던 나라의 역사, b는 나라의 처참한 몰락, c는 앞으로 해야할 과제였다. 그런데 a의 ‘혁세(赫世)’를 신라 시조 ‘혁거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혁거세’를 ‘혁세’로 줄여서 표기한 사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삼국의 시작을 운위하면서, 마한을 먼저 언급한 후, 혁거세가 발흥한 고로 진한과 변한이 이를 좇아 흥기했다고 해석하면, 등가치인 ‘혁거세’와 ‘진한’이 겹친다. 따라서 오역임을 알 수 있다.

한문에 능한 담원 정인보도 “前回 二段 ‘赫居世’라 한 것은 모다 ‘赫世’의 誤”라고 정정했다(정인보, ‘오천년간 조선의 ‘얼’ (95)’ ‘동아일보 1935.7.9’. 그러나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상)’, 서울신문사(1946)을 비롯한 이후 문헌에서는 일체 수정되지 않았다.

반면 ‘혁세’는 ‘누대’ 즉 ‘대대로’를 가리킨다. 가령 대대로 현귀한 고관을 가리키는 ‘혁세공경(赫世公卿)’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맞다.

a.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 누대로 발흥한 까닭에, 진한과 변한이 (마한을) 좇아 흥기했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해 6백여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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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훤은 영광의 유산과 함께 패망의 고통스러웠던 유산을 반추했다. 그런데 ‘함께하는 고통’은 기쁨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결집시킨다고 한다. 프랑스인 르낭(Joseph Ernest Renan)은 “민족적인 추억이라는 점에서는 애도가 승리보다 낫습니다. 애도의 기억들은 의무를 부과하며, 공통의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돼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입니다”고 설파했다. 공유된 고통스런 과거를 강조함으로써 유대민족의 경우에서처럼 영광보다는 수난과 회한의 과거에서 민족의 바이탈리티(vitality)는 터져 나온다고 한다. 진훤은 의자왕에 대한 애도 기억을 반추시킴으로써 ‘공통의 노력’인 복수심 발화에 성공했다.
진훤은 영광스러운 백제의 재건과 관련해 전주 천도 이듬해에 독자 연호 ‘정개(正開)’를 반포했다. 정개에는 ‘바르게, 열고·펴고·깨우치고·시작한다’는 의미가 함축됐다. 진훤은 단순한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진훤 왕은, 우리나라 최대 정복군주 의자왕의 이루지 못한 꿈을 구현하기 위해, 백제 자력에 의한 국토 통일을 천명한 것이다.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무려 100여 개의 성을 공취했었다. 진훤 왕은, 그렇지만 평화적으로 신라로부터 선양(禪讓)받고자 했다. 전주에 도읍한 진훤 왕은, 꿈의 구현을 위해 힘차게 치달렸다.
/편집=조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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