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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날들의 초상肖像(2-5)] 괴성의 산울림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26일
야산의 8부 능선쯤이었다. 응원군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삽상했다. 그 바람에 힘입어 형님과 나는 정상을 향하여 진력했다. 그때 잡힐 듯 가까운 옆 능선에서 괴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꾸웨에에엑!”
자주 다니는 산길이었음에도 그 울림이 섬뜩했다. 주변의 수풀이 아무리 비단결같이 넘실대도 자연의 내막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 숲 바닥에 쌓인 낙엽 더미가 헝클어진 모양을 보고 지나온 터였다. 불규칙했지만 쟁기로 갈아엎은 듯 휘저어진 광경이었다. 분명 배고픈 짐승의 퍼포먼스 한바탕이 벌어졌음이었다.
“저것 보세요. 동물 흔적이에요. 보나 마나 멧돼지겠죠?”
내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러게. 자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네. 말하자면 지금이 짐승들의 보릿고개인 게지.”
형님이 숨죽이듯 대답하는 찰나였다.
“우웨에에에엑!”
또다시 몹시 자극적인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영락없이 멧돼지의 절규라고 여겨졌는데 형님이 갑자기 말길을 돌렸다.
“어야, 설마 곰은 아니겠지? 괴이한 폭음이 예사롭지 않네.”
곰이라고 하니 그 말도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이 산줄기가 지리산 어느 끝자락 정도이니 길 잃은 반달곰이 내려왔을 추론도 가능했다. 둘은 무섬증 반 설마 반의 심정이 되었다. 기실 곰보다 더 무섭게 다가온 건 멧돼지였다. 곰은 설마였지만, 멧돼지는 원인관계가 따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고 해야 할지, 일종의 부채감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부채감에 이르니 머리가 띵해지며 속내는 좀더 복잡해졌다. 마치 그 녀석이 네 발과 주둥이로 가랑잎을 뒤진 행태가 우리를 향한 반격 같기도 했다.
작년 가을이었다. 산행하는 발치에 도토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금방 세상으로 분리된 생명체가 “안녕?” 하면서 인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도토리를 주워 올렸다. 갈색으로 윤나는 보석 같았다. 딱딱한 듯 부드러운 질감의 겉껍질을 만지작거리다 숲속에 휙 던져 놓고 오리라 맘먹었는데 그게 뭐라고 어느새 내 호주머니 안에 들어갔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밤나무 아래 알밤을 줍던 추억과 겹쳤다. 아침 일찍 밤나무 근처에 가면 거인의 눈망울처럼 여기저기 불뚝, 불뚝 밤톨이 떨어져 있었다. 그 가을 아침의 고소하고 달큰한 그리움이 되살았다. 아련한 향수를 떨떠름한 도토리 열매에 기대보려 했을까.
형님과 나는 그것들을 주워 날랐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한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세 개 하다가 한 줌 두 줌이었다가 호주머니 가득 담아 날랐다. 태산을 이룰 만큼은 아니었지만, 티끌을 모은다는 건 이런 것임을 경험했다. 우리가 다닌 길목엔 주로 졸참나무 도토리가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도토리를 총알 도토리라 했다. 정말 길쭉한 모양새가 총구에 맞춤한 총알 같아 보였다. 같은 졸참나무 열매도 크기나 길이가 다 달랐다. 물론 도토리 키 재기라면 할 말이 없는 정도이기는 하지만.
도토리는 매일 산에 오르면 길가에 몇 줌씩 떨어져 있었다. 굵고 동글동글한 것은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 열매였다. 묵을 쑤었을 때 찰지고 맛있는 건 졸참나무 도토리라고 했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벌레가 먹거나 썩기 시작했다. 흙에 닿은 부분이 비에 젖으면 곧바로 하얀 뿌리를 내렸다. 도토리는 동물을 위해 주워가면 안 된다고 알고 있지만 이미 겨울이 오기 전에 일어나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면서 썩기 전에 인간이 좀 취해도 괜찮지 않을까 뻔뻔해지기도 했다.
첫 마음에 나는 가을 인사를 나누는 기분으로 도토리를 주웠다. 그다음은 추억이 그리워서라고 포장했다. 그 마음을 조금 지속하다가 눈 내리는 겨울날에 다시 가져다 뿌려 놓으면 그만이라고 위안했다. 유행가 가사처럼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줄 일도 없는데 나중에는 줍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숲속 어디선가 숲의 정령이나 숨어 있는 눈들이 지켜보는 것 같은 따가움도 느꼈다. 한편으로는 도토리나 탐내는 좀스러운 인간일까 하여 호주머니 속 알갱이들을 일순간에 다 쏟아내고 싶기도 했다. 50억을 퇴직금으로 주고받은 뉴스를 접하거나 세상에 큰 도적들이 시글시글하다는 미디어의 댓글들을 마주하면 작은 열매 몇 개를 주우며 졸아드는 자신의 현 좌표가 한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토리 줍기는 끝을 맺었다.
내가 이 산을 등산하게 된 것은 형님이 이 근처로 이사 오며 보낸 유혹도 한몫했다.
“어이, 우리 집 근처 계곡에는 비가 많이 오면 작은 폭포가 생긴다네. 함께 가보지 않겠나?”라며 직접 찍은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오곤 하였다. 어느 때는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은 늘 자연의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을 들을 수 있어. 그리고 산소 포화도가 달라.”
덕분에 지난해 늦여름부터 산행길을 옮겼다. 듣던 바대로 계곡엔 물줄기가 옹달샘 물처럼 항상 흘렀다. 숲길은 주로 흙길이어서 걷는 데 피로감이 덜했다. 산이 주는 느낌이 아늑하고 친근해 또 가고 싶어지는 산이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 봄 산을 오르며 생강나무꽃이 노랗게 피던 경치와 진달래가 미소 짓던 날들을 함께했다. 연둣빛 봄날을 보내고 초여름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참나무 잎들은 야들야들하게 피어났고 오리나무는 작년에 맺은 열매가 까맣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새롭게 초록색 방울을 매달았다. 그런 즈음에 짐승이 휘적거린 산비탈 낙엽 밭을 보았고 그 울부짖음 같은 괴성을 들었다. 불현듯 지난 가을날 도토리를 주웠던 일이 가책으로 상기되었다. 법정 스님은 어릴 때 몸이 불편한 엿장수의 엿판에서 엿가락 몇 개를 슬쩍했던 일을 반성하셨는데 나는 말 못하는 짐승의 밥 몇 톨을 주웠던 일을 반성할 일이다.
무섬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산 정상에 올라 미리 도착해 있던 일행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동물의 괴성을 들었나요?”
“소리? 응, 들었어. 근데 그게 왜 동물 소리라고 들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소리가 동물이 아니면요?”
“에이 아니야. 사람 소리이지. 하긴 괴력의 발성이긴 했어.”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우리가 오른 옆 능선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근육질이 탄탄했다. 구릿빛 피부가 윤나는 강골 체격의 중장년 남자였는데 성난 산짐승에는 감히 견줄 수가 없이 수려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형님이 생전 처음 보는 상대에게 질문했다.
“저기요, 혹시 올라오시는 도중에 소리지르셨나요?”
“네. 그런데 왜죠?”
남자가 그게 뭐 어떠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죠? 우리는 사나운 동물이 나타난 줄 알고 쫄았잖아요.”
무례함에 가까웠지만, 놀란 마음이 놓였던지 툭 터놓고 쏘아 묻는데 남자가 답했다.
“저기요, 환장할 것 같은 세상에 그 어디서도 소리지를 곳이 없어요. 그래서 산에 올라올 때마다 끓어오르는 심사를 한 번씩 내뱉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남자는 모처럼 대화 상대를 찾았다는 듯 태연하게 응했다. 그리고 한숨을 몰아쉬며 요즘 특히 중장년 남성이 토로할 곳이 없는 실정이라 했다. 테니스 동호회에서 활동한다는 그는 동호회 모임을 가도, 친한 친구를 만나도 서로 경쟁하거나 잘난 척만 해대는 통에 울화를 해소할 길이 없단다. 집에서는 조용한 가장일 뿐 속풀이할 수 없다며 하소연하였다. 그 괴성의 장본인에게 산에서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내지르면 짐승들에게 해가 된다는 꼰대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산 정상 안내판에 “이 산에는 멧돼지가 서식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산 아래에서 목격한 참나무밭 정황으로 보아 그 정보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심증만 굳혔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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