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원 작> 봉하노송의 절명 제19회-최후의 만찬 6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8년 12월 06일
중천까지 올랐던 해가 서산 너머로 지고 나면 달이 떠오르는 날이 많다. 음력 초순의 어스름한 초저녁, 서쪽 하늘에 잠깐 얼굴을 내민 초승달은 금세 사라지지만 그 달을 보는 사람은 어마어마하다. 가느다란 초승달은 점점 차올라 음력 중순으로 넘어가서는 둥근 보름달이 된다. 온전한 둥근 얼굴로 중천에 뜬 보름달도 초승달 마냥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달이나 중추절 보름달의 경우, 보는 사람이 부지기수 아닌가. 음력 보름날이 지나 조금씩 이지러진 달은 서서히 반달이 된다.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손톱 모양 같기도 하고, 여인네의 깜찍한 눈썹 같기도 한 그믐달로 변한다. 그믐달은 음력 스무 이레까지 새벽녘 동쪽 하늘에 잠시 내걸리지만 보는 사람이 적다보니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정작 그믐날엔 깜깜한 밤하늘에 아예 얼굴도 내밀지 못하니 이 얼마나 애처롭고 가련한가. 그런 그믐달의 달빛은 희미하다. 깜깜한 밤하늘에 떠서 온 세상을 훤히 비추고 싶겠지만 이지러진 얼굴색은 어두울 뿐이다. 그런 한 때문일까. 새벽녘의 밤하늘에 뜬 그믐달은 흡사히 시퍼렇게 날이 선 날카로운 비수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많은 가슴에 비수를 품고 모두가 깊이 잠든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는 사람의 눈엔 더더욱 그렇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믐날인 내일 아침, 하늘 가는 길로 나설 봉하노송. 그는 초선 국회의원 시절이었던 1988년, 5공비리청문회에서 송곳 같은 질의와 명패 투척 사건 등으로 정치판의 초승달로 떠올랐다. 이후 그의 정치인생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한민국 정치판의 보름달이 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만월이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그는 반달로 변했고, 퇴임 후엔 그믐달이 되고 말았다. 2009년 음력 사월 스무 여드레 밤, 그는 가족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가 맥주 두 잔을 마시는 사이 술자리는 오붓해지고, 그미의 얼굴색은 점점 밝아졌다. ‘시간은 삼분 전 밤 아홉시다. 지금 쯤 텔레비전을 켜야 KBS아홉시뉴스를 제대로 시청할 수 있다. 그런데 만에 하나 KBS아홉시뉴스에서 우리가족의 비위를 건드는 뉴스가 나온다면 이 오붓한 술자리가 어떻게 될까? 모처럼 밝아진 집사람의 얼굴은 다시 굳어질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밤 KBS아홉시뉴스에서 어떤 뉴스가 나올지 대충은 짐작한다. 낮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박차대 게이트와 관련된 뉴스들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뉴스들을 접하게 된다면 집사람의 기분은 크게 상할 것이다. 그래서 난 지금 집사람이나 호걸이 텔레비전을 켜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생의 마지막 밤, 어찌 나도 KBS아홉시뉴스가 어떤 뉴스를 다룰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오늘밤을 이승의 마지막 밤으로 정해 두긴 했지만 어찌 난들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KBS아홉시뉴스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살길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밤 내가 해야 될 일은 집 사람과 호걸이 걱정과 근심을 잠시라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나라 언론이 다룬 박차대 게이트와 관련된 주요 이슈는 이렇다. 우선은 메이히로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왕의 남자’로 불리는 S그룹 천두모 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시점이다.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임박한 천두모 회장의 혐의는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등이다. 다음 주 초 천두모 회장이 구속되면 검찰수사는 박차대 회장 구명로비 과정에 천 회장 외에서 제3의 인물이 있는지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메이히로 정부의 초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L 씨의 재소환 문제도 주요 이슈다. L 씨는 박차대 회장의 P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다. 박차대 게이트에 대한 막바지 수사가 경남지역의 정계 인사로 향하고 있다는 점과 봉하노송의 측근인 서화담 의원의 형사처벌 문제도 오늘 언론의 주요 이슈다. KBS9시뉴스에서 이런 뉴스들을 다루게 된다면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오랜 만에 술을 입에 댄 그미가 평상심을 잃을 수도 있다. 봉하노송은 이 때문에 걱정을 잡아맬 수가 없다. 그래서 거실의 TV가 켜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KBS9시뉴스가 시작 될 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미와 호걸은 텔레비전을 켤 생각이 없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취중 대화에 푹 빠져있는 탓이다.
“방울이 애비야, 저녁 먹기 전에 방울이 애미와 통활 하는 것 같던데, 그래 다들 잘 지낸다카드나?” “네, 잘 있다니 걱정 마세요.…” 그미와 호걸이 미국에 있는 며느리와 손주 얘기를 나누자 봉하노송의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금세 그는 가슴을 짓찧는 아픔을 느꼈다. ‘한국시간으로 내일 점심시간 이전에 내가 절명했다는 부고가 미국에 전해지면 며느리와 손주는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를 것이다. 방울이 이 녀석이야 아직 나이가 어려서 삶이 뭐고 죽음이 뭔지 그 개념을 모르기에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겠지만 며느리가 받을 충격은 매우 클 것이다. 아무튼 아무 탈 없이 며느리와 손주가 귀국해야 될텐데…방울아,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못난 이 할아버질 오래 오래 기억해 줄 수 있겠지?…방울아, 지금 이 할아버지는 니가 많이 보고 싶구나. 정말 보고 싶다, 방울아!…’ (계속) |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8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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