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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원 작> 봉하노송의 절명 제28회-오래된 생각이다 1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10일
봄날은 가고 있다. 가지 말라고 붙들어도, 가지 못하게 막아서도, 기어코 봄날은 갈 것이다.

안채 거실에서 외동딸 호연과 통화를 하던 중 다시 또 이명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 커지자 봉하노송은 현관문을 열고 앞뜰로 나왔다. 술기운이 쫙 퍼진 그의 몸이 신선한 공기가 고픈가 보다. 무의식 중에 그의 입과 코가 활짝 벌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봄숨 예닐곱 모금을 양껏 들이마셨다. 풀냄새와 꽃향기가 뒤섞인 봄숨을 몇 모금 마시고나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도 잦아들었다.

가는 봄날에 피고 지는 낯익은 꽃향기가 그의 몸속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퍼진 듯 했다. 숭어리 꽃송이에 주렁주렁 슬픔을 매달고 있는 듯한 아카시아의 꽃향기, 뾰족한 가시가 돋친 가슴을 붙안고 훌쩍 훌쩍 울고 있는 듯한 찔레꽃의 꽃향기도 온몸에 퍼진 듯 했다.

우거진 초록에 엉겨서 온갖 꽃들이 무수히 피고 지는 계절의 여왕 오월 하순의 선잠이 든 밤. 알딸딸하게 술이 취한 봉하노송의 눈엔 봄꽃이 죄다 서글퍼 보였다. 안채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불빛 속에서 가녀린 얼굴로 밤잠을 청하고 있는 봄꽃마다 서글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오월의 끝을 향해 흐르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봄꽃도 많이 졌다. 땅에 떨어진 어떤 꽃은 선홍색 피를 흘리는 것 같고, 어떤 꽃은 하얀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비바람에 몸살을 앓다가 진즉 땅에 떨어졌을 어떤 꽃들은 가슴가슴 시커멓게 피멍이 든 것 같다.

그윽한 꽃향기가 온 몸에 퍼져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가슴 아픈 추억과 까마득한 그리움까지 스멀스멀 떠오르게 하는 밤, 봉하노송은 밤새 목 놓아 울고 싶다. 알뜰했던 그 맹세도, 실없던 그 기약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생의 마지막 밤이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부우!…부우!…부우!…”

다시 또 봉하노송의 귀에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앞뜰의 정원수인 소나무 위에서 들리는 듯 했다. 그 소나무는 부엉이 바위 쪽 담장 근처에 서있다. 환청이 분명한 줄 알면서도 그는 소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몇 그루의 소나무상단을 낱낱이 살펴봐도 서럽게 우는 부엉이는 보이지 않았다.

봉하노송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부엉이 바위 쪽의 앞뜰 담장 근처의 소나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부엉이 울음소리는 아니나 다를까 환청이 분명하다고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돌연 아까 전화통화를 했던 호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연이와 목서방은 요즘 얼마나 괴로울까?…’

봉하노송과 통화를 끝내기 전, 호연은 2~3분 동안 울먹였다.

“아빠한테도 죄송하지만 흐윽! 흐으윽!…목 변호사한테도 정말 미안하구요. 애들한테도 미안해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녜요, 아빠! 흐윽! 흐으윽!…”
남편과 어린 두 딸한테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있다는 호연의 말이 떠올라 봉하노송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다.

자식을 둔 상당수의 남성들이 그렇듯 봉하노송도 아들 호걸한테는 엄부였다. 젊은 시절에 그는 매를 들고 어린 호걸의 엉덩이를 심하게 때린 적도 있다.

그러나 딸 호연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호연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속을 크게 썩인 적이 없다. 그런데다 호연은 봉하노송이 사법고시를 패스 하던 해에 태어나 집안에서는 ‘복덩이 딸’로 여겼다. 그러다보니 봉하노송과 봉하부인의 눈엔 호연의 허물도 곱게만 보였다. 그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호연은 어려서부터 부모님한테 혼이 나거나 사랑의 매를 맞는 적도 없다.

호연이 결혼을 결심한 뒤, 예비 신랑인 목서방을 부모님께 처음으로 소개하는 상견례를 할 때다. 봉하노송은 목서방을 특별한 거부감 없이 사윗감으로 받아 들였다. 그만큼 호연을 믿었다. 사랑하는 딸이 선택한 남편감인데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키운 외동딸인데, 박차대 게이트가 발생한 뒤, 호연과 관련된 돈문제가 집안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지난 2월 어느 날이었다. 봉하사저에 유정상 전 비서관이 찾아왔다. 유 전 비서관이 사저를 찾아오면 늘상 봉하노송을 먼저 만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유 전 비서관이 그러지 않았다.

“유 전 비서관이 도착했다는데,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나?”

비서실에 들른 봉하노송이 김경남 비서관에게 물었다.

“아까 사저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화장실에 가신 것 아닐까요?”

“유 전 비서관이 사저에 들어 온 시작이 정확하게 언제였노?”

“제가 알기론 11시쯤 사저에 도착하셨습니다. 지금이 11시 30분이니 벌써 30분이 넘은 것 같습니다.”

“30분이 지났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 화장실에 있을 리는 없고, 혹시 안채로 들어간 건 아이가?”

“노송님!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봉하노송이 궁금한 점이 뭐냐고 물었다.

“유 전 비서관님이 정말 사랑채나 서재에 들르지 않으셨나요?”

“내가 오전 10시부터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유 전 비서관이 서재에 들르지 않았다. 물론 사랑채도 살펴봤지만 유 전 비서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디를 가신걸까요?”
“글쎄다. 김 비서관도 잘 알고 있겠지만 유 전 비서관이 이런 사람이 아이다.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집안 어디서 집 사람을 만나고 있는 모양인데, 혹시 집 사람과 관련된 무슨 일이 크게 터진 것 아이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봉하노송이 비서실 밖으로 나갔다.(계속)
서주원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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