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 공감, 톡톡! 현충시설! 이달의 독립운동가] 9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입력 : 2019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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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1888 .1. 25 ~ 1957. 1.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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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국군의 바탕이 된 한국광복군 창설의 주역 지청천 장군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려서 배재학당에 다니며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5년 일본의 침략이 자행되자 1909년 3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일본에서 신학문과 군사학을 공부한 장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일본군을 탈출해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장군은 당시 만주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설립된 독립군 학교,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으로 활동하며 독립투쟁의 선두에 설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운동세력 강화에 힘쓰던 장군은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의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3부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 총사령관으로 만주 일대를 누비며 독립전쟁을 지속했다. 특히 1933년 6월, 중국의용군과 합세해 중국 연변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해 ‘대전자대첩’과 같은 대승리를 거두는 등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후 군무부장을 겸했던 장군은 1940년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장군은 총사령관으로서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해 일제 타도와 독립을 위해 활동했고, 광복 직후까지 광복군을 총지휘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고, 이후 정계에서 활약하던 지청천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제공=서부보훈지청 |
전라매일 기자 / 00hjw00@hanmail.net 입력 : 2019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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