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2-3)] 유년의 들목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13일
강물에 노을이 풀린다. 동진강 갓길에 주차하고 둑길을 걷는 다. 바람이 깃드는지 갈대가 흔들린다. 강기슭의 목선들이 비스 듬히 기댄 채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그 곁에 왜가리 한 마리 미 동이 없다. 무슨 사연이 있어 저토록 강물만 바라보고 있을까. 다가간다. 한쪽 날갯죽지가 늘어져 있다. 몇 걸음 옆으로 옮겨 머리만 주억거릴 뿐, 재바름을 놓은 지 오래인 것 같다. 동진강은 내 유년의 들목이 닿아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 동 진강을 끼고 부안 동진과 김제 죽산이 나뉜다. 부안에서 동진강을 건너면 그리 멀지 않은 죽산에 고모 집이 있었다. 그곳은 내 가 항상 가고 싶은 곳이었다. 구멍가게를 했던 고모네 집은 화수분 같은 곳이었다. 그 동 네에 하나뿐이었던 고모네 점방에는 독사탕과 센베과자와 둘 둘 말린 이불빵 등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판자로 덕지덕지 엮어 만든 좌판 밑으로 가끔 사탕이라도 한 알 떨어져 있으면 티 나지 않는 수확이었다. 그 달달함 때문에 내 유년은 늘 강 건 너를 동경했다. 동진대교가 생기기 전, 사람들은 백산다리를 에돌아 건너거 나 나룻배를 타고 김제를 거쳐 대처로 나가곤 했다. 고모 집을 가기 위해 십 리 길을 걸어 동진나루에 다다랐을 때 강물의 수 위가 높아져 있으면 낭패였다. 뱃삯을 치르면 강물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건너겠지만 무일푼인 내가 배를 타고 건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들물 때 강물이 불어 있으면 낮아질 때까지 기다리며 이곳저 곳을 기웃거렸다. 천막으로 지어진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에 귀 기울였고, 보자기 하나 달랑 펴놓고 바늘이며 실을 펼쳐 놓은 좌판 앞에 쭈그려 앉아 물이 낮아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 다가 서해로 빠져나간 강물이 얕아지면 바지를 걷어올리고 건넜다. 강물이 가슴께까지 닿으면 두려움에 숨이 컥컥 막혔다. 그 럴 때면 고모네 집의 알사탕과 하얀 쌀밥을 떠올렸다. 논농사를 짓는 고모네 밥상은 우리 집 꽁보리밥과는 달리 하 얀 쌀밥이었다. 큰 조카인 나를 유난히도 챙겼던 고모가 부모님 보다 좋았다. 그 때문에 방학 때는 물론이고 틈만 나면 걸어서 라도 고모 집에 갈 생각만 했었다. 고모 집에 가면 쌀밥은 물론 이거니와 사탕은 덤으로 먹을 수 있었으니 나는 도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겨울에 고모 집에 가는 일은 쉽지 않 았다. 강물이 꽁꽁 얼면 건널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제 강 점기 때 세운 백산다리를 돌아 삼십 리 둑길을 걸어야 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시절을 거쳐 70년대 중반인 내 사춘기 시절만 해도 동진강 유역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했고 별의 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진강을 끼고 들녘이 이어져 있어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흥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70년대 초반 17만 에 달하는 부안 인구와 김제의 인구가 들고났던 곳이다. 여기에 는 술장사며 떡장사, 잡화장사에 논두렁 깡패도 들끓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삶의 모습들이 강물처럼 들어오고 흘러가 고 했으니, 이름하여 강제비*도 판을 쳤다. 이들은 강의 낮은 곳 을 택하여 주로 여인네나 어린아이들을 업어서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였다. 음흉한 강제비들은 여염집 아낙이나 처자의 엉덩 이 받쳐 든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여인들의 괴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과부댁들은 일부러 강을 건너기 위해 온다는 풍문까지도 기슭 억새밭에 풀어져 있었으니, 동진강은 노을노을 흘러가는 강물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다. 계화 간척공사와 함께 동진대교가 생긴 후부터는 고모댁과 지척이 되었다. 그러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구멍가게는 내 유 년과 함께 사라졌고 고모님도 돌아가셨다. 이후 새만금 물막이 공사는 강물의 유속을 더 느려지게 하더니 인근 목선들마저 사 라지게 했다.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왜가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 려다본다. 기슭 낡은 목선에 기대어 숨을 돌린 노을이 시월막사 리 강물을 따라 내 유년의 기억처럼 희미해져 간다. 차에 오른다. 동진강 다리를 건넌다. 콘솔박스에 갈무리해 둔 알사탕 하나를 꺼내 문다. 사탕을 입에 넣어주던 고모의 뭉툭한 손이 그리워진다. * ‘강제비’는 필자가 만들어낸 은어이며 업어서 강을 건네주는 사람을 ‘월천쟁 이’라고 부르기도 했음.
/배귀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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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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