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4-04-30 03:05:03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 PDF원격
검색
PDF 면보기
속보
;
뉴스 > 칼럼

[소소한 날들의 초상肖像(2-7)] 아줌마와 형님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4월 16일
온통 회백색이다. 겨울의 속살을 헤집듯 날씨가 심통을 부린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어 주거나 흙냄새 실어 오는 이른 봄비 한줄기가 간절한데 그렇지도 않다. 낮게 드리운 안개처럼 심신이 무겁고 움직이는 관절마다 찌뿌듯하다. 이런 때 가끔 들렀던 대중목욕탕에 선뜻 갈 수 없음이 아쉽다. 요즘처럼 샤워 문화가 발달한 때에 진부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후끈한 온탕과 오싹한 냉탕의 기운을 온몸에 교대로 끼얹고 싶다. 거리 두기 세월의 강을 건너는 요즘은 언감생심으로 정경이나마 살짝 떠올리며 사우나탕 마니아 형님들은 안녕하신지 안부를 묻고 싶다.
널찍한 그 대중탕 안은 관능미로 유명한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이나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 같은 모조품 벽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에덴동산의 사과나무가 연상되는 모자이크가 넓은 벽면에 큼지막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훈훈한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선악과나무 근처로 여인들이 모였다. 혼자 오는 이도 있고, 가족을 동반하기도 했다. 특히 개인으로 와서 삼삼오오 앉은 마니아들도 있었다. 업주에게는 가끔 오는 사람들보다 날마다 일수를 찍는 이 열혈 손님들이 찐 고객인 셈이었다. 그들은 일정 시간 탕 안을 점령하여 사우나를 만끽했다. 때로는 이웃에게 군기 반장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모종의 권력 행사 같은 거였다.
그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최고의 공간은 사우나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곳을 말하려니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이라는 낡은 우스갯말이 떠오른다. ‘첫째, 그들은 겁이 없다. 둘째, 신체에 문신이 있다. 아줌마도 친해지면 형님이라고 부른다. 종종 떼로 몰려다닌다. 칼을 잘 쓴다. 금붙이를 좋아한다. 검은색 의상을 좋아한다. 인정사정 안 봐준다. 밤이면 그들을 무서워하는 이가 있다.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 활동 구역이 있다.’ 등이다.
어쩌면 식어 빠져 진기 없는 밥같이 시시한 조크일 수 있지만, 그럴싸한 부분도 있다. 혹시 ‘자신도 아줌마면서 아줌마의 저력을 뭐로 보고. 자기 얼굴에 침 뱉나?’라고 빈축을 살 수도 있겠다. 어디까지나 한번 웃고 넘길 것을 변명으로 탕 안으로 들어가 본다.
거의 매일 출근하는 사우나 족들은 더러는 언니 동생으로 호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향 이름이나 아파트 명칭을 붙여 부산 형님, 리젠시빌 형님 등으로 불렀다. 서울댁, 부산댁에 붙였던 택호를 떼고 형님을 붙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형님들을 정점으로 아우가 모였고 모인 그들은 뭉쳤다.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 아니 못 할 말이 없었다. 각자 겪은 풍진 세상사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삶의 온갖 설화가 그곳에서 휘돌았다. 시댁, 친정, 자녀, 고부 관계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사업, 치정, 드라마, 드물게는 정치 이야기까지 전신에서 쏟아지는 더운 땀방울과 함께 분출되었다.
그들은 목욕탕을 활동 구역 삼아 두 시간 혹은 한나절 가량씩 머물렀다. 몸속 노폐물은 물론 마음속 응어리까지 뽑아내는 듯했다. 그야말로 때 빼고 광을 낸 후 자택 또는 일터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다시 뭉치면 새로운 화제로 활기가 돌았다. 때때로 내가 몰랐던 정보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몸 사리고 귀퉁이에 끼어 있어도 따뜻한 공기에 이완된 내 귀는 나팔꽃처럼 활짝 피었다. 대화 내용 대부분은 마이동풍처럼 흘러갔지만, 몇 가지는 가끔 떠오르기도 한다.
어느 때는 멸치젓갈을 담그고 어느 시기에는 새우젓을 절였다. 갑오징어를 넣어 미역국을 끓였다든가, 초여름 열무는 지방보다 일산 쪽에서 내려오는 게 맛있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차이는 이렇다. 각종 보험에 관한 소식도 그들은 빠삭했다. 계절 따라 나오는 농산물로는 참깨를 사고팔고, 마른 고추 등의 흥정이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양한 상품의 홍보와 무슨 무슨 다단계 상품까지 물망에 올랐다.
거래가 끝나면 수분 보충 시간이었다. 얼음을 우둑우둑 깨물어 먹는 사람도 있고 각자 챙겨 온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적당히 블렌딩한 원두에 달보드레한 맛을 가미한 블랙커피가 한 순배씩 돌았다. 아무개가 집에 가면서 들여놓고 갔다거나 누군가가 방금 오면서 인사로 한 병 가져왔다고 들이밀었다.
커피 다음으로는 대형 용기의 코카콜라를 아무 아우가 제공했다면서 병마개를 땄다. 주로 알음알음으로 마셨지만 어쩌다가는 띄엄띄엄 방문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인심을 베풀었다. 그런 점에서 인정사정 안 봐준다는 말은 불량배들과 달랐다.
톡 쏘는 맛의 콜라 한 모금, 향기로운 원두커피 한 잔을 공손하게 받아들이며 혹시 그녀들은 피 색깔까지 갈색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상당한 양의 콜라와 커피를 들이켰는데 이것들이 핏빛까지 착색하지는 않을까 하고 어리석은 염려도 되었다. 그 외에 오미자, 오디, 칡, 녹차 등 좋다는 진액은 다 가져와 서로 나누며 교유했다.
한 형님은 번쩍이는 금붙이를 휘감은 채로 등장하기도 했다. 패물도 날마다 목욕시켜서 광을 내는지. 일종의 자기만족이나 과시욕이었을지. 아니면 집을 비운 새 도둑에게 털릴 게 염려되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는 기본이었다. 미소까지도 묵직하고 누렇게 보일 지경의 이 형님 외출 의상은 필시 검은색 슈트 일색일 거라고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이가 정좌한 자리는 사우나실 문을 열면 바로 마주보이는 곳이었다. 출입문을 여닫을 때 환기가 되어 숨이 막히지 않고 발열체와 거리가 있어서 사우나하기에 최적의 고정석이었다. 누구나 그 자리에 눈길이 갔지만, 아무나 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만이 거의 매일 같은 시각에 동일 자리에 앉았다. 수문장 같은 그이는 아줌마 계의 큰형님일 거로 짐작되었다.
문신이 조폭과 공통점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거의 전신을 쪼아서 폭력 영화의 상징처럼 한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쪼는 건 사실이다. 십중팔구는 눈썹이나 아이라인을 영구 또는 반영구로 시술한다. 외모 가꾸기에 문외한인 나도 가끔 눈썹을 쪼러 갈 정도다.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한 포인트 정도 자기만의 도안을 새기기도 했다.
아줌마와 조폭은 칼을 쓴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렇더라도 뉴스에 나오는 불량한 형님의 칼은 굳이 어필하고 싶지 않다. 아줌마 형님의 칼은 사람을 살린다. 깎고 저미고 다져서 가족을 건사한다. 밤이면 그들을 무서워하는 이가 있다? 이건 맞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겠지만 밤의 세계도 무서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어쩌면 내가 본 사우나실 형님들의 실태는 눈치코치 없고 볼썽사나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을 돌보고 가정을 꾸리면서 비법을 축적해 온 가정관리 전문가라 하겠다. 살아온 과정에서 쌓인 각각의 애환과 긴장을 대중목욕탕에서나마 풀어버리는 거다. 그런 그들에게 이곳은 노폐물 처리장인 동시에 오롯한 에너지 충전소다. 잠시나마 자신을 위해 만사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는 해방구다. 설령 아줌마와 조폭이 형님이라는 공통점이 있을지라도 아줌마의 저력은 인류를 이끄는 힘의 원천이다. 다소 과장되게 아부하며 목욕탕을 나서는 개운한 기분으로 칙칙한 마음을 떨친다.

/김숙
전)중등학교교장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24년 04월 16일
- Copyrights ⓒ주)전라매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오피니언
사설 칼럼 기고
가장 많이본 뉴스
오늘 주간 월간
요일별 기획
인물포커스
교육현장스케치
기업탐방
우리가족만만세
재경도민회
기획특집
제1회 군산시 관리감독자 교육으로 산재 예방한다  
2024 무주방문의 해 자연특별시 무주, 특별한 적상!  
살아서 돌아오라, 살려서 돌아오라!  
김제시, 안전한 식·의약 환경조성과 감염병 예방 집중  
군산시민을 위한 일자리가 뜬다  
남원시, 스프링피크 맞아 자살 사망 예방 집중관리 총력  
초록물결 ‘제21회 고창 청보리밭축제’ 로 오세요  
깊은 고민으로 공간에 입체감 입혀… ‘희망의 장수’로 새단장  
포토뉴스
전북대, ‘글로컬대학 비전선포식’ 개최
전북대는 25일 국제컨벤션센터 컨벤션홀에서 ‘글로컬대학 비전선포식’을 개최했다. <사진>이날 비전선포식에는 양오봉 총장을 비롯해 교 
국립전주박물관, ‘문방사우를 찾아라’
국립전주박물관(관장 박경도)은 누리과정(5~7세)과 연계한 단체 교육프로그램 문방사우를 찾아라를 4월부터 7월까지 총 10회 운영한다. &l 
한국전통문화전당, 전통문화 세계화를 위한 발판 마련
한국전통문화전당(원장 김도영, 이하 전당)은 지난 4월 3일부터 10일까지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방문해 ▲세종학당재단의 유럽거점과의 전통 
국립군산대학교 김정숙 교수, 개인전 ‘숨’ 개최
국립군산대학교 미술학과의 김정숙 교수가 오는 4월 17일부터 28일까지 전북특별자치도 도립미술관 서울분관에서 개인전을 연다.이번 전시회는 전북 
전통문화전당 전주공예품전시관 공예주간 전라도 일반참여처 모집
한국전통문화전당(원장 김도영)이 ‘2024 공예주간’ 행사에 함께할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예 작가와 단체 등의 일반참여처를 오는 17일까 
편집규약 윤리강령 개인정보취급방침 구독신청 기사제보 제휴문의 광고문의 고충처리인제도 청소년보호정책
상호: 주)전라매일신문 /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55. 남양빌딩 3층 / mail: jlmi1400@hanmail.net
발행인·대표이사/회장: 홍성일 / 편집인·사장 이용선 / Tel: 063-287-1400 / Fax: 063-287-1403
청탁방지담당: 이강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미숙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전북,가00018 / 등록일 :2010년 3월 8일
Copyright ⓒ 주)전라매일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