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 전적지 발굴, 늦은 만큼 완벽 기해야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31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도 4백년 넘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민초들의 역사를 다시 살린다는 소식이다. 진안군은 29일 임진왜란 당시였던 1592년 7월 7일 조선군과 왜군간에 벌어졌던 웅치전의 흔적 찾기를 위한 세부계획을 내놨다. 전북도와 진안군 및 완주군이 지난해부터 벌여온 웅치전투 현장의 실증적·객관적 규명을 위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계획이라고 한다. 웅치(熊峙)가 위치한 진안군, 웅치와 맞닿은 이치(梨峙)가 행정구역인 완주군은 그동안 시굴 및 발굴조사에서 당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진지터 등을 확인된 데 따른 조치다. 하지만 이번 계획이 완주군 참여 없이 진안군 단독으로 실시키로해 실효성에 의문이 인다. 웅치와 이치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전주 관문이자 교통의 요지였고, 두 고개가 맞닿아 장소 구분이 오히려 어색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전주는 조선 최대의 곡창이다. 당시 왜군이 이 고개로 쳐들어온 것은 군량미 확보를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이 고개에서 죽음의 혈전을 감행했던 것 역시 쌀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가적으로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전멸했다. 반면 왜군은 이기고도 진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사즉생의 각오로 싸운 결과였다. 조선군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동한 왜군은 시신을 모아 묻고 ‘弔朝鮮國忠肝義塚’이란 묘비를 세운 후 진격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충무공 이순신은 ‘若無湖南 始無國家’라며 이 전투 결과를 찬양했다. 때문에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일원의 웅치(熊峙, 곰티)는 분명 당시의 흔적이 아직 수없이 남았을 수밖에 없을 터다. 진안군과 완주군의 협치를 당부한다. |
전라매일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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